잠갔다/잠궜다 담궈/담가


물 속에 물건을 가라앉히는 잠그다, 문을 열지 못하도록 빗장을 채우는 잠그다, 모두 흔히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어, 았/었 등으로 활용하면 순간 헷갈리기 십상입니다.



우리 말에서 아/어, 았/었 등으로 활용은 우리 말에 능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흔히 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먹다 + 아/어 = 먹어, 삼다 + 아/어 = 삼아 (양성모음, 음성모음 구분)
곱다 + 아/어 = 고와, 덥다 +아/어 = 더워(ㅂ이 오/우로 변경됨)


가르다 + 아/어 = 갈라, 기르다 + 아/어 = 길러 (ㄹ이 추가됨)


치르다 + 아/어 = 치러 (치루다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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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그다도 잠구다가 아닙니다. 또 담그다도 담구다가 아닙니다.


고로 잠갔다, 담갔다가 맞습니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은데 


언듯 익숙하지 않아서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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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성향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페이지가 있더군요.
http://h21bbs.hani.co.kr/politicalcompass/

웹주소를 보아하니 한겨레신문에서 만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해 보십시오.

물론 저도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시장 자유라는 항목(가로값/Left---Right)에서는 -5 정도가 나왔습니다. 또 개인자유라는 항목(세로값/Authoritarian---Libertarian)에서는 -2 정도가 나오는군요.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개인주의적 성향은 조금 있고 시장주의에서는 조금 좌파적 성향이 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입니다. 대체로 제 성향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히 찍혀 있는 유명한 정치인들의 이름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뭐 노회찬, 권영길, 심상정 등이야 물론 다들 짐작하는 바이고 겉으로도 그렇게 행동하니 모르지 않을 테고 간디, 달라이 라마, 만델라 등은 조금 좌파적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저보다도 심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심대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누구였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유명한 우익 인사들이 모두 제 근처에 몰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세훈, 정몽준, 김형오 등이 모두 좌파랍니다.

믿어지십니까? 설마 한겨레에서 임의적으로 이들의 정치성향을 파악해 배치해 놓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근 직접 평가해 본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마도 80년대, 조금은 막스, 레닌을 읽었다고 해야 지성이라고 평가되던 시대에 조금은 현학적으로 좌파임을 천명하던 습관이 그대로 드러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모두 좌파면 우리나라는 지금 국회가 완전히 좌파에 장악됐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까?

표리부동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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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 법정


무소유(無所有)
-법정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 뿐이요."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 2차 원탁 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이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긴요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茶來軒)을 찾아 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蘭)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 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雲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리고 앞 개울 물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이 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래글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蘭)을 가꾸면서도 산찰(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말았다. 밖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 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 삼 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 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몱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유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들어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훌훌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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