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스티 네 잔 주세요”

당구장에 여러 명이 몰려 오면 그 중 한 명은 메뉴 통일을 시도한다. 어디서나 주문이 복잡해지면 골치가 아프다고 알기에 누군가 한 명은 꼭 나서서 하나의 메뉴로 통일해서 달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통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개성을 살리려는 주문은 나온다.

“난 주스”

“난 사이다”

“니가 뭔데 남이 먹을 걸 강요해~”

결국 옥신 각신 하더니 주스 1잔, 사이다 2잔, 아이스티 1잔이 주문된다.

언듯 요즘 젊은이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친구들과 우루루 몰려 당구를 치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대부분 당구장에서는 묻지도 않고 요쿠르트를 주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당구장 말고 식당엘 가도 누군가가 나서서 메뉴 통일을 외치던 친구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물론 각자 먹고 싶은 것들이 있었겠지만.... 메뉴가 복잡해지면 요리 시간이 올래 걸린다는 것을 알기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냥 동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밥 한 끼 시켜 먹으며 굳이 고집 세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개성과 다양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통일이라는 것은 결코 쉽게 이뤄지진 않는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바꿔보면 아무도 남의 말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굳이 고집부려야 할 일이 아닌데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다. 대의명분이 분명한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언젠가부터 리더십이 강조되는 세상이 됐다. 너도 나도 리더가 되려 한다. 하지만 모두가 리더가 될 수는 없을 터. 누군가는 팔로워가 돼야 한다. 리더의 의견을 존중하고 약간의 손해가 있더라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도 팔로워가 되지 않는 세상... 아무도 리더가 되지 못한다.

인생 도처 유 상수

당구에는 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구에 처음 입문하면 30부터 시작해서 50, 80, 100, 120, 150, 200, 250, 300 순으로 올라갑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1000도 있고 2000도 있습니다. 1만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4구의 수지이고 3쿠션(대대)에서는 따로 수지를 책정합니다.

처음 당구에 입문하면 오른손 왼손 모두 흔들흔들 모든게 어색하고 안절부절하는 실력이 30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당구장에서 보내느냐, 당구장 사장하고 얼마나 친분을 쌓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 1년 당구에 빠져 살았다고 하면 150 정도가 됩니다.

이쯤 되면 당구를 쫌 안다고 하는 수준은 됩니다. 나름 자세도 안정되고 조절도 하게 되고 비로소 당구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수준입니다.

여기서 2~3년 바짝 당구에 관심을 가져야 300이 됩니다.

 300정도 되려면 당구장 사장과 쏘주 한 잔 하는 정도는 사귀어야 하며 당구장 내 여러 고수들과도 친분을 갖고 노하우를 전수받아야 비로소 오를 수 있는 경지입니다. 재수생이라면 학력고사 50점 정도는 까먹을 각오를 해야 하고 대학생이라면 두과목 정도는 F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당구를 10년 넘게 쳐도 300이 못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자친구의 유혹을 못 이기거나 취업의 압박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끔은 되지도 않을 고시 따위의 헛된 꿈으로 300으로 가는 길이 위협받기도 합니다. 이런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면 그냥 200이나 250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300정도에 이르면 흩어져 있는 공을 쉽게 모을 수 있고 한 번 모인 공은 쉽게 5~10점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상대에게는 겐세이로 공격을 방해합니다.

이런 정도의 고난을 극복하고 얻은 300이라는 명예는 대단합니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한 10년쯤 전만해도 대부분의 당구장 천장에는 ‘300 이하 맛세이 금지’라는 푯말이 대롱대롱 메달려 있었습니다.

드디어  사장님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맛세이를 구사할 자격이 부여되는 경지가 300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300이 되면 야스리(줄)를 찾습니다. 큐를 가져다가 야스리로 큐팁의 모양을 다듬고 탁탁탁 두드려서 자기 나름의 모양을 만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장님과 친분을 유지한다면 개인큐를 만들어서 당구장 한 구석에 따로 걸어놓고 전용으로 사용하는 특권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마추어들도  국제식 대대(프로 선수들이 국제 경기를 하는 정규 사이즈)에서  3쿠션을 즐깁니다.

나름 경지에 이른 당구 매니아라면 누구든지 도전하고 싶어집니다. 세계적 수준의 선수들의 경기 영상을 보면서 ‘나도 똑같은 조건에서 당구를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동호인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똑같은 조건에서 나는 어느정도 실력을 갖고 있는지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대대는 보통 처음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14점 정도의 수지를 부여합니다. 앞돌리기, 뒤돌리기, 옆돌리기, 빗겨치기 등 다양한 트랙을 구사하지만 아직 적절한 당점을 알지 못하고 스트로크도 불안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매니아들은 20~25점 정도의 수지를 갖습니다.

30점이면 아마추어 중에는 최고의 실력이라고 인정합니다. 이정도 실력이면 전국 규모의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도 입상할 수 있는 정도가 됩니다.

30점이 넘는다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프로에 입문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프로 선수들에게는 따로 수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붙여보자면 세계 랭킹 상위권에 입상하는 선수라면 아마 50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300들은 이 국제식 대대에서는 어느 정도 수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개인차가 매우 큽니다.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4구를 위주로 쳤고 3쿠션에 능통한 수준이 아니라면 18점 정도의 수지를 받습니다.

300 정도를 치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를 만나도 당구 좀 친다고 인정받습니다.  학창시절 당구에 돈 깨나 깨졌구나 합니다.

사회에서는 300정도 치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대를 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겨우 입문을 면한 수준입니다.

 그렇게 대대에서 20점 이상으로 올라갈려면 또 1~2년은 쳐야 합니다. 그것도 나름 고수에게 어느 정도 배움을 가져야 가능하지 혼자 책보고 연습해서는 올라가기 쉽지 않습니다. 파이브앤 하프시스템 아무리 달달 외워도 20점의 문턱은 높기만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25점 정도가 되면 아마추어로서는 할만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상 올라가기 위해서는 굉장히 특별한 정도의 자질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이상의 경지는 한 10년 당구를 쳤다해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지위가 아닙니다.

매일 일정시간 이상 꾸준히 연습을 하거나 프로 또는 그 이상의 선생님을 만나 꾸준한 배움을 갖거나 이마저 아니면 탁월한 눈썰미와 피지컬 능력을 보유하고 나아가 일반인과는 다른 멘탈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얻어지는 것이 30점이라는 경지입니다.

그런데도 대대가 있는 당구장을 다녀보면 30점 정도를 치는 고수는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당구 동호인의 수준입니다. 조금 규모 있는 당구장에는 이름 없는 프로 한 두 명은 있습니다.

인생 도처 유상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딜 가나 무림의 고수가 있기 때문에 항상 몸을 낮추고 조심해야 한다는 인생 격언입니다.

당구 조금 친다고 까불다간 큰코 다치기 십상입니다. 항상 배운다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또 겸손해도 어려운 게 세상입니다.

삼인행에 필유아사란 말도 있습니다. 3명만 모여도 그 중에는 내 선생님이 될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노력과 성취의 과정에서 얻어진 값진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몸에서 무수히 많은 사리가 쏟아진 것은 그 깨달음 알알이 몸에 하나씩 박히면서 쌓인 것일 겁니다.


강원도 남부지역 1박 2일


올해도 봄을 맞아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몇년째 2월이면 가족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세종시에서 시작해 논산, 부여, 청양을 둘러 보았고 지지난해에는 군산, 채석강, 정읍, 김제 등을  구경했습니다.

올해에는 홍천에서부터 시작해 평창, 오대산, 정선, 동해, 삼척, 태백 등을 돌아보았습니다.



이효석 생가


평창군 봉평면에 있는 이효석 생가 터에는 자그마한 기와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효석이 태어나 살았던 생가는 이미 다른 주민에게 팔렸고 이 터를 산 새 주인은 기존의 초가집을 허물고 새로 기와집을 지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월정사에 들렀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공연한 조급함에 그 유명한 전나무 숲길은 걸어보지도 못했습니다.

8각9층탑은 그 구조적 아름다움이 역시 소문대로였습니다. 

팔각 기단 위에 감실을 두로 9층을 올렸는데 처마에는 아직도 풍경이 달려 있어 아름다움을 더했습니다.

또 새로 올린 것인지 애초 그대로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탑들이 상륜부가 유실된 데 비해 월정사탑은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누가 보기에도 새로 만들어 세운 탑 앞의 기도하는 보살상은 영 생뚱맞아보였습니다.


 하지만 절집 대부분은 한국전쟁에 불타고 그 이후 지어진 것이라 크게 볼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규모나 양식도 눈에 띄는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본당이 적광전이었는데 본존은 석가모니불을 모신게 특이했습니다. 적광전은 주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주로 대적광전이라고 이름하는데) 석가모니불은 주로 대웅전이라 이름하여 모시는데 어정쩡하게 섞어놓은 것도 무슨 의미가 있겠죠.

해가 지기 전에 서둘로 상원사로 올라갔습니다.

상원사는 월정사보다도 더 대단한 것이 없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중학교 시절 배운 수필 ‘어떻게 살 것인가’가 떠올라 지는 해를 뚫고 서둘러 올라갔습니다.

수필에 따르면 방한암 선사의 숭고한 죽음으로 6. 25의 재난 속에서도 우리의 고찰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7km정도의 길은 비포장도로였고 아직 군데군데 길은 얼고 눈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올라간 고찰은 까마득 높은 계단이 곡선을 그리며 이어져 지친 나를 더욱 아득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기대하고 올라간 절은 월정사보다도 더 볼 것은 없었고 타지 않아 남아 있었다는 건물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내려가는 길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먹은 황태구이정식은 참으로 맛있었습니다.

20여가지 나물로 구성된 밥상은 어느 것 하나 맛이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물 하나하나가 모두 독특한 맛과 향을 가졌는데 대부분 나물로만 구성돼 있어도 12000원 가격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나물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 이름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배불리 먹고도 오히려 남은 주메뉴 황태구이는 차라리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미 해가 깊어 진부 면내에 머문 오투모텔은 4인가족 5만원에 따뜻한 온돌이었습니다.

TV, 와이파이, 컴퓨터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진부면에서 아우라지까지

59번 국도를 따라 정선으로 내려가는 길은 오대천 변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따스하게 내리째는 봄 햇살아래 많지 않은 강물이 반짝였습니다. 산에서는 눈녹은 물이 적지않게 흘러내렸습니다. 

강 따라 흐르는 길은 큰 고개를 넘지 않아 평온했고 큰 차들도 지나지 않아 봄기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길 곳곳에 공사를 알리는 표시들이 세워져 있어 언젠가 다음 이곳을 찾을 때에는 이런 평온함을 느낄 수는 없겠구나하고 서러웠습니다.

정선에 거의 이르러서 동해로 난 42번 국도로 갈아탔습니다. 이번에는 골지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였습니다.

아우라지역은 이미 관광지로 개발돼 잘 정돈돼 있었습니다.

역 앞에서 먹은 콧등치기 국수는 그리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과하지 않은 맛으로 별미삼아 먹기에 충분했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 레일바이크를 탈려고 했지만....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가면 출발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패스


아우라지에서 삼척까지

아우라지에서 동해로 넘어가는 코스는 큰 고개를 몇개나 넘어야 하는 험한 코스였습니다. 긴 오르막길 끝에 고개를 넘으면 짧은 내리막이 몇번 반복되고 마지막 800미터가 넘는 백복령을 넘고 난 뒤에는 끝없이 꼬불꼬불한 급경사 내리막길이 20km 넘게 이어졌습니다.  

대관령이나 미시령, 한계령을 넘을 때처럼 재 정상에 펼쳐지는 동해의 장관은 없었습니다. 


추암 촛대바위

일출로 유명한 추암은 한 15년 전 대학교 졸업여행에서 다녀온 적이 있는 곳입니다. 

 입구까지 이어진 엄청 넓은 대로는 아마도 동해 항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정작 추암 입구에 이르면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추암역 밑으로 이어진 굴다리길은 정말 이곳이 그 유명한 해돋이 명소로 이어지는 길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추암의 모습은 15년 전과 많이 달랐습니다. 마을 집들은 절반 이상 허물어졌고 그 자리에는 주차장이 많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야트막한 산에는 조각공원이 들어서 조금의 볼거리를 더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건너편 언덕에는 으리으리한 무슨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생뚱맞은 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다도, 갈매기도 촛대바위도 군 초소도 철조망도 그대로였습니다. 아직도 그 철조망으로 간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서루

삼척 시내에 있는 죽서루에 들렀습니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이 떠올라 인터넷을 찾아보았습니다.

眞진珠쥬館관 竹듁西셔樓루 五오十십川쳔 나린 믈이 太태白백山산 그림재를 東동海해로 다마 가니, 찰하리 漢한江강의 木목覓멱의 다히고져. 王왕程뎡이 有유限한하고 風풍景경이 못 슬믜니, 幽유懷회도 하도 할샤, 客객愁수도 둘 듸 업다. 仙션사랄 띄워 내여 斗두牛우로 向향하살가, 仙션人인을 차자려 丹단穴혈의 머므살가.
< 현대어 풀이>진주관[삼척] 죽서루 아래 오십천의 흘러내리는 물이 (그 물에 비친)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옮겨)가니, 차라리 그 물줄기를 임금 계신 한강으로 돌려 서울의 남산에 대고 싶구나. 관원의 여정은 유한하고, 풍경은 볼수록 싫증나지 않으니, 그윽한 회포가 많기도 많고, 나그네의 시름도 달랠 길 없구나. 신선이 타는 뗏목을 띄워 내어 북두성과 견우성으로 향할까? 사선을 찾으러 단혈에 머무를까?


맹방해수욕장

맹방해수욕장의 시원함은 동해 최고의 절경이라고 할만 했습니다.

상맹방, 하맹방, 덕산으로 이어지는 해수욕장은 6km에 이렀습니다. 더욱이 이 넓은 해수욕장이 곧게 이어져 한 눈에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막힐 곳 없는 이 곳의 바람은 다른 지역의 두배는 넘게 거세게 이는 듯했습니다.

문득 서울에서 바람이 없어 날리지 못하고 차에 넣어뒀던 가오리연이 생각나 꺼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바람은 연을 날리기에 너무 강했습니다. 꼬리의 무게를 더해 균형잡기를 시도했지만 종이가 버티지를 못하고 찢어져버렸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연실을 감다가 옆에 있는 전신줄에  휘리릭 감기는 바람에 추억은 현장에 두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임원항 회센터

역시 동해 여행의 백미는 싱싱한 회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겨울이어서인지, 비수기여서인지, 주중이어서인지 대부분의 횟집들은 썰렁해 보였습니다. 아내는 썰렁한 횟집의 생선들은 수족관에 오래 머물러서 맛이 없다며 유명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임원항입니다.

임원항에는 부두 옆으로 조그마한 횟집들이 길게 줄지어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활기는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도다리, 광어, 가자미 등 납작한 생선 시리즈로 주문했습니다. 회는 포를 뜨지 않고 듬직듬직 썰어진 채 접시에 무채도 깔지 않도 두둑히 나왔습니다.

밑반찬도 하나 없이 다만 채소와 고추장, 겨자 간장이 나올 뿐이고 다만 회무침을 해 먹을 수 있도록  야채와 미싯가루를 넣어서 한 그릇이 나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가격 대비 양도 많았고 맛도 좋았습니다.


임원항에서 서울까지

회로 넉넉하게 배를 채우고 나왔을 때는 이미 오후 5시가 넘었습니다. 애초 1박을 더 하고 아침 일찍 출발할 계획이었지만 조금 무리해서라도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강릉으로 올라가 고속도로를 타는 것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지방도로를 타고 태백까지 갔습니다.

태백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태백시는 영동에 있는 도시가 맞습니다. 태백에서 시작하는 낙동강이 남해로 이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영남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태백을 넘어 영월로 가는 38번 국도는 거의 고속도로에 가까울 정도로 편도 2차선에 중앙분리대까지 완벽하게 돼 있었고 교차로나 신호등도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내리막길이 이어져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에서는 속도를 내기 어려웠습니다.

두문동터널에서 영월 읍내까지 60km정도가 한번도 쉼 없이 내리막길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일부러 영월 읍내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약간의 휴식을 가진 후 제천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애초 태백이나 영월에서 1박을 할 예정이었지만 마지막 1박을 덜 하는 바람에 조금 빡센 일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연승의 기억이 패배의 경험을 부른다

당구 뿐만 아니라 어떤 스포츠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연승이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도 질 것 같지 않고 승리의 자신감이 마음 속에 가득찹니다.

그런데 연승이 계속되면 누구나 이 연승의 이유가 뭘까? 이 연승의 비결이 뭘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나름대로의 연승의 비결을 찾아냅니다.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시작입니다.

손쉬운 일반화의 오류.

연승이 지속된 데에는 일단 충실한 연습이 절정에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약해지는 고리를 잘 만났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감입니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승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특히 당구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런 특징을 간과하고 최근 배운 스트로크, 두께를 보는 느낌 또는 특별한 경험을 승리의 원인으로 판단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하면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 집착이 시작됩니다.

굉장히 단순한 요인 하나로 연승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단순한 오직 하나의 이유라면 그것은 오직 자신감 뿐입니다.

이 이외의 요인에서 승리의 요인을 찾고 그 요인에 집착하는 순간 비로소 패배는 시작됩니다. 연승 뒤에 연패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당구를 치다 보면 특정 포지션이 굉장히 잘 맞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땐 정말 어떻게 쳐도 다 맞는 느낌입니다.

이럴 때로 스스로 분석하게 됩니다.

이런 분석의 끝에 대부분의 당구인들이 내리는 결론은 1. 요즘 참 잘 밀어쳐서 그래. 2. 최근 배운 파이브 앤 하프시스템대로 치니 다 맞네. 3. 스트로크를 바꾸고 시내루가 좋아졌어. 정도입니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면 집착이 시작됩니다. 1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에만, 2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2에만 집착합니다.

당구는 어느 한 가지만 잘 했다고 맞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스트로크 한 가지만 보더라도 큐 속도, 큐 깊이, 큐 스톱, 큐 속도의 변화(가속도) 등이 모두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공의 배치에 따라 적절한 스트로크를 해야 하는 것이지 모든 포지션에 획일적으로 적용 가능한 스트로크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반화의 유혹에 빠집니다. 승리에 도취되다 보면 이런 유혹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지만 한가지 원칙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는 없습니다. 



언제나 고민의 경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모든 포지션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공감각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머리의 이론적 분석은 가급적으로 내려놓고 몸의 느낌을 믿어야 합니다. 가상의 트랙을 그려 놓고 그 트랙으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지 느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어느 것 하나라도 불편함이 느껴진다면(키스, 어려운 두께, 구사하기 힘든 회전량 등) 그걸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것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두꺼운 자신감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승리의 비결이고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삶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사업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모든 순간에 하나의 절대 원칙을 세우고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열린 눈으로 나머지를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들어 너무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에 몰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것에 몰입한 것보다는 더 낫다는 쪽으로 생각하면 맞지만 결국 행복 그 자체도 거기에만 몰입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공감각적으로 동물적 감각 그 자체를 끌어올려야겠습니다.


당구, 쳐야 하는대로 치지 말고 공이 맞게 쳐야 한다

당구는 그 특성상 친구끼리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면서 시작합니다.

때로는 아빠가 아들, 딸의 손을 잡고 오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당구를 가르쳐주겠다는 아빠의  열정은 쉽게 식습니다.

아들, 딸이 이미 충분히 배워 온 다음에 꾸준히 같이 오는 경우는 있지만 입문 수준에서 실력 차이가 상당한 상태에서 아빠가 꾸준히 가르쳐주는 경우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없습니다.

이는 꼭 아빠와 아들 사이뿐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고점자(알공 200점 이상)도 당구 입문자를 데리고 세번 이상 당구장을 찾지 않습니다.

때문에 당구를 입문하는사람들은 대부분 50점 또는 80점 정도 수준입니다. 100점만 돼도 아주 인내력이 강한 친구이거나 친분이 아주 대단한 경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당구는 50점한테 30점이 배우고 100점한테 50점이 배우고 200점한테 100점이 배우는 구조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신이 30점일때 배운 당구는 100점만 돼도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100점 시절 배운 당구는 200점이 돼면 고스란히 휴지통에 버려야 합니다. 물론 과거에 배운 습관을 하루 아침에 버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은 자신이 과거에 50점 시절에 100점한테서 배운 정보를 금과옥조로 여깁니다.

아마도 지금 자기 자신보다도 못 치는 친구에게서 배운 정보일텐데도 불구하고 10년 전 배운 기억을 그대로 고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로는 습관이 돼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만히 관찰한 결과 습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번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결코 바꾸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구는 맞게 쳐야 합니다. 어떤 이론이나 시스템에 따라 치는 것이 아니라 공이 공을 맞게 치는 것만이 오직 진리입니다.

많은 시스템과 이론을 배웠다면 이를 내재화하고 마음 속에서 묵혀서 나의 감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임을 치는 순간에는 머리로 계산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서 최대한 그대로 발휘해야 합니다.





모든 판단 근거를 ‘원래’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원래인지를 물으면 답변을 못합니다. 원래가 뭐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원래’를 따지곤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원래인지는 모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자신이 과거에 알고 있는 것(그 근거가 무엇이던간에) 을 원래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그것을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합리적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최첨단 과학이라는 각종 이론들도 하루 아침에 부정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과학시간에 열심히 배웠던 뉴턴은 물론이요 어려워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조차도 벌써 부정되는 시대입니다.

사람은 습관적으로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기 십상이지만 이런 기준들은 틀리기 마련입니다.

비단 과학분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효’라고 하는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외웠던 신체발부 수지부모 따위의 구절은 고사하고 엄마 아빠가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효였던 10년 전의 개념도 이제는 옳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꾸 옳다고 하는 것을 머리 속에 넣어두면 사고는 경직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 들어오려고 해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원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방법은 유연한 사고입니다. ‘원래’ 따위에 구속되지 말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져야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흡수하고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배우지도 받아들이지도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배우는 이 내용도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또 새로운 정보로 대체될 것이라는 여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강대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봐서도 안 됩니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봐서도 안 됩니다. 오직 텅 빈 마음으로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 강할수록 자신으로 하여금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하는 강제성도 강해지지요. 이념가들이 변화하지 못하다가 실패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구는
쳐야 하는대로 치는 게 아니라 맞게 쳐야 하는 것입니다.

담배 제로(0)시대로 가는 청사진을 제시하라


이제 솔직해집시다.

담배는 더이상 거래돼서는 안될 독성물질입니까, 아니면 그냥 선호에따라 피울 수도 있고 안 피술 수도 인는 기호식품입니까????


그냥 기호식품이라면 징벌적 요금을 강제할 필요도 없고 공간적 제한을 둘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발암물질이라는 확정적 의견이 제시됐고 사회적으로도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다면 이제는 한시적인 차원에서 담배값 인상이라는, 모든 책임을 소비자에게 돌리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담배값이 두배 가까이 올랐지만 당구장을 하는 제 입장에서는 소비 감소를 거의 느낄 수 없습니다.

물론 금연을 선언하고 일주일 넘게 실천하는 사람도 몇 명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피우고 있습니다.

휘발유값이 1200원 정도 하던 시절에는 1500원만 되도 길거리에 차가 한 대도 없을 거다, 2000원만 되면 현대차도 문을 닫을 거다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도심의 교통체증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소비자만 죽어나는 꼴입니다.

이제 담배가 사회적으로 독성물질이라는 합의가 이뤄졌다면 이제는 장기적으로 담배 공급 0(제로)로 가는 청사진이 제시돼야 합니다.

소비자가 알아서 줄이라는 구호는 공허합니다. 담배갑에 어떤 사진을 넣거나 담배 이름을 아무리 혐오스럽게 지어도 중독이라는 이름은 지독히 흡연자의 선택을 강요합니다.

우선 담배 공급량 자체를 국가에서 통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차분하지만 점진적으로 줄여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예고해야 합니다.

올해의 공급량을 100으로 둔다면 1년에 2씩만 줄인다면 50년 후에는 담배 공급 0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를 명시적으로 발표한다면 끝까지 선제적으로 금연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나중에는 아주 비싼 값으로 담배를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감수할 것입니다.

공급량을 줄여 나간다면 굳이 가격 정책에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시장 가격이 높이지겠지만 공급량 감소 폭보다 금연을 실천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면(1년에 흡연자 중 2% 이상 금연에 성공한다면) 가격이 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1년에 20%씩 올려 나가면 50년 뒤에는 열배의 가격이 된다는 것을 미리 공지하면 금연에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결국 흡연률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존 흡연자보다는 새로 유입되는 흡연자를 막아야 합니다.

지금 19세 이상 담배를 구매할 수 있다면 1년 후에는 20세 이상, 2년 후에는 21세 이상..... 그러니까 지금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세대는 앞으로도 영원히 담배를 배울 수도 피울 수도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30년 후에는 적어도 50세 이상은 돼야 1갑당 3만원 정도의 값을 지불하면서 피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금연을 위한 지원 정책도 충분히 마련돼야 합니다. 금연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담배 세금의 대부분을 투여해서라도 금연 시도에 대해서는 더이상 실패가 생기지 않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흡연을 혐오하는 것으로는 금연의 방법이 되지 않습니다.

금연을 위한 구체적인 요령, 심리 지원, 약물지원까지 다각적으로 마련돼야 하며 각종 방송,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홍보해야 합니다.

흡연자에 대해서는 건강보험에 대한 비용 인상 등 지속적인 압박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기꺼이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은 담배를 정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흡연자이든 비흡연자이든 담배는 장기적으로는 분명히 사라져야 하는 독성물질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흡연자들은 간혹 담배만이 스트레스를 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담배가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는 느낌은 체내에서 니코틴이 감소할 때 오는 스트레스를 니코틴 재공급으로 해결하는 것일 뿐입니다.

비흡연자 누구도 담배를 피우지 못해서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담배는 그저 끊지 못해 피우는 것일 뿐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담배 0로 가는 청사진에 동의해야 합니다.

50년 이후에는 담배를 기존 마약과 동일하게 처리를 해서 어떤 생산도 거래도 흡연도 범죄로 처벌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면 담배는 점차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당구를 잘 이기는 사람은?

당구를 치면 어떤 사람이 잘 이길까요?

1) 배짱 좋은 사람
2) 악착같은 사람
3) 성실한 사람

제가 오랫동안 당구장을 하면서 관찰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어떤 친구는 언제나 승률이 60% 근처에 있고 어떤 친구는 언제나 40% 근처에 있었습니다.

당구는 실력에 맞추어 수지를 조정합니다.

당연히 잘 치는 사람은 높은 점수를 놓고 잘 치지 못하는 사람은 낮은 점수를 갖습니다. 때문에 승률은 언제나 50% 근처에서 형성됩니다.

이런 수지는 전국적으로 어느정도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쳐도 어느정도의 균형 승률이 유지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승률을 유지하는 친구가 있고 언제나 패배에 마음아파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게임을 갖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실력에 대한 평가에 더하여 승률에 대한 평가도 수지에 반영됩니다.

때문에 승률이 높은 친구는 언제나 친구들에게 등떠밀려 수지가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지를 조정해도 또 몇 게임이 지나고 나면 결국 배짱 좋은 친구가 높은 승률을 유지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배짱 좋은 친구들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친구들에 비해이길 확률이 높습니다.

여기서 배짱이 좋다거나 악착같다거나 성실하다는 표현은 사회적 관계가 좋고 나쁘거나 도덕적 우위를 조금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들 무난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인간관계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성격차이는 언제나 승부에서 나타납니다.

배짱 좋은 사람이란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입니다.

굳이 나쁘게 표현하면 단순 무식한 사람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체로 이론적 수준은 그리 높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살펴보면 그마저도 자신의 이론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말로는 끌어쳐야느니 밀어쳐냐느니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렇게 치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자신이 잘 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고수들도 이들을 보고 당구를 잘 친다고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승률이 높아도 수지가 무작정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확신이 있습니다.
옳든 그르든 자기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데 아주 충실합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야 공이 맞는지를 감각적으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을 치는데 꼭 필요한 만큼만의 정보를 이용합니다. 아주 작은 정보와 아주 작은 판단을 아주 정확히 수행합니다.

때문에 이들은 실패했을 때도 스트레스가 적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이론에 빈틈이 아주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경기가 박빙으로 흐를 때 배짱 좋은 사람들은 더욱 판단을 단순화합니다. 결국 스트레스 경쟁에서 언제나 우위를 차지합니다.

악착같은 사람도 승률이 높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체로 연습을 많이 합니다. 지는 것이 싫기 때문에 연습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합니다. 때문에 대체로 실력 자체가 높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진짜 빛나는 것은 승부의 순간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본인 스스로 집중력을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이기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승부 자체에 집중합니다. 승부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나아가 승리의 단맛을 철저하게 만끽합니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운동선수 출신들이 이런 부류가 많습니다. 운동선수가 이렇게 훈련되는 것인지, 이런 성격이 운동선수를 많이 지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무슨 활동으로 운동을 했던지 하다못해 태권도 학원을 다녔던 친구들도 이런 성격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언제나 앞의 두 부류의 먹잇감이 되곤 합니다.

자주 진다고 해서 패배가 익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고 나면 언제나 속상합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공부와 연습 뿐입니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연습도 제일 많이 합니다. 당연히 이들을 바라보는 고점자들은 이들을 가장 실력이 높다고 인정합니다. 때문에 이들은 대체로 프라이드가 높습니다. 승률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수지는 계속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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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실력도 없고 제대로 치지도 못하는 사람이 승률이 제일 높은게 당구입니다.

그렇지만 모두들 한번이라도 더 이기기 위해 당구를 연습하고 또 연습니다.

당구는 꼭 이기기만을 위해 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모두다 열심히 살지만 정작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부지런한 사람보다 배짱있는 사람,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돈 많은 사람만 행복한 것은 아니니까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높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꼭 성적이 실력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돈이나 성적이 아니라 행복과 실력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