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승의 기억이 패배의 경험을 부른다

당구 뿐만 아니라 어떤 스포츠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연승이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도 질 것 같지 않고 승리의 자신감이 마음 속에 가득찹니다.

그런데 연승이 계속되면 누구나 이 연승의 이유가 뭘까? 이 연승의 비결이 뭘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나름대로의 연승의 비결을 찾아냅니다.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시작입니다.

손쉬운 일반화의 오류.

연승이 지속된 데에는 일단 충실한 연습이 절정에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약해지는 고리를 잘 만났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감입니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승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특히 당구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런 특징을 간과하고 최근 배운 스트로크, 두께를 보는 느낌 또는 특별한 경험을 승리의 원인으로 판단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하면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 집착이 시작됩니다.

굉장히 단순한 요인 하나로 연승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단순한 오직 하나의 이유라면 그것은 오직 자신감 뿐입니다.

이 이외의 요인에서 승리의 요인을 찾고 그 요인에 집착하는 순간 비로소 패배는 시작됩니다. 연승 뒤에 연패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당구를 치다 보면 특정 포지션이 굉장히 잘 맞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땐 정말 어떻게 쳐도 다 맞는 느낌입니다.

이럴 때로 스스로 분석하게 됩니다.

이런 분석의 끝에 대부분의 당구인들이 내리는 결론은 1. 요즘 참 잘 밀어쳐서 그래. 2. 최근 배운 파이브 앤 하프시스템대로 치니 다 맞네. 3. 스트로크를 바꾸고 시내루가 좋아졌어. 정도입니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면 집착이 시작됩니다. 1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에만, 2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2에만 집착합니다.

당구는 어느 한 가지만 잘 했다고 맞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스트로크 한 가지만 보더라도 큐 속도, 큐 깊이, 큐 스톱, 큐 속도의 변화(가속도) 등이 모두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공의 배치에 따라 적절한 스트로크를 해야 하는 것이지 모든 포지션에 획일적으로 적용 가능한 스트로크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반화의 유혹에 빠집니다. 승리에 도취되다 보면 이런 유혹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지만 한가지 원칙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는 없습니다. 



언제나 고민의 경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모든 포지션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공감각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머리의 이론적 분석은 가급적으로 내려놓고 몸의 느낌을 믿어야 합니다. 가상의 트랙을 그려 놓고 그 트랙으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지 느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어느 것 하나라도 불편함이 느껴진다면(키스, 어려운 두께, 구사하기 힘든 회전량 등) 그걸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것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두꺼운 자신감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승리의 비결이고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삶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사업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모든 순간에 하나의 절대 원칙을 세우고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열린 눈으로 나머지를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들어 너무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에 몰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것에 몰입한 것보다는 더 낫다는 쪽으로 생각하면 맞지만 결국 행복 그 자체도 거기에만 몰입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공감각적으로 동물적 감각 그 자체를 끌어올려야겠습니다.


당구, 쳐야 하는대로 치지 말고 공이 맞게 쳐야 한다

당구는 그 특성상 친구끼리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면서 시작합니다.

때로는 아빠가 아들, 딸의 손을 잡고 오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당구를 가르쳐주겠다는 아빠의  열정은 쉽게 식습니다.

아들, 딸이 이미 충분히 배워 온 다음에 꾸준히 같이 오는 경우는 있지만 입문 수준에서 실력 차이가 상당한 상태에서 아빠가 꾸준히 가르쳐주는 경우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없습니다.

이는 꼭 아빠와 아들 사이뿐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고점자(알공 200점 이상)도 당구 입문자를 데리고 세번 이상 당구장을 찾지 않습니다.

때문에 당구를 입문하는사람들은 대부분 50점 또는 80점 정도 수준입니다. 100점만 돼도 아주 인내력이 강한 친구이거나 친분이 아주 대단한 경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당구는 50점한테 30점이 배우고 100점한테 50점이 배우고 200점한테 100점이 배우는 구조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신이 30점일때 배운 당구는 100점만 돼도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100점 시절 배운 당구는 200점이 돼면 고스란히 휴지통에 버려야 합니다. 물론 과거에 배운 습관을 하루 아침에 버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은 자신이 과거에 50점 시절에 100점한테서 배운 정보를 금과옥조로 여깁니다.

아마도 지금 자기 자신보다도 못 치는 친구에게서 배운 정보일텐데도 불구하고 10년 전 배운 기억을 그대로 고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로는 습관이 돼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만히 관찰한 결과 습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번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결코 바꾸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구는 맞게 쳐야 합니다. 어떤 이론이나 시스템에 따라 치는 것이 아니라 공이 공을 맞게 치는 것만이 오직 진리입니다.

많은 시스템과 이론을 배웠다면 이를 내재화하고 마음 속에서 묵혀서 나의 감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임을 치는 순간에는 머리로 계산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서 최대한 그대로 발휘해야 합니다.





모든 판단 근거를 ‘원래’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원래인지를 물으면 답변을 못합니다. 원래가 뭐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원래’를 따지곤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원래인지는 모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자신이 과거에 알고 있는 것(그 근거가 무엇이던간에) 을 원래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그것을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합리적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최첨단 과학이라는 각종 이론들도 하루 아침에 부정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과학시간에 열심히 배웠던 뉴턴은 물론이요 어려워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조차도 벌써 부정되는 시대입니다.

사람은 습관적으로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기 십상이지만 이런 기준들은 틀리기 마련입니다.

비단 과학분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효’라고 하는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외웠던 신체발부 수지부모 따위의 구절은 고사하고 엄마 아빠가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효였던 10년 전의 개념도 이제는 옳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꾸 옳다고 하는 것을 머리 속에 넣어두면 사고는 경직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 들어오려고 해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원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방법은 유연한 사고입니다. ‘원래’ 따위에 구속되지 말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져야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흡수하고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배우지도 받아들이지도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배우는 이 내용도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또 새로운 정보로 대체될 것이라는 여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강대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봐서도 안 됩니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봐서도 안 됩니다. 오직 텅 빈 마음으로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 강할수록 자신으로 하여금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하는 강제성도 강해지지요. 이념가들이 변화하지 못하다가 실패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구는
쳐야 하는대로 치는 게 아니라 맞게 쳐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