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과”가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은 이미 오래된 레퍼토리다. 일왕은 이미 오래 전 ‘통석의 념’이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우리나라는 진정성이 없다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또 얼마 전 세상을 뜬 김근태는 아름다운 용서의 예를 보여주기도 했다. 고문 경찰 이근안이 그 상대였다.
과거든, 역사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사과와 반성, 화해의 액션은 사회 곳곳에서 수도 없이 지속돼 왔다. 하지만 어떤 때는 사과를 하는 그 진정성이 두고 두고 의심받고 어떤 때는 기꺼이 피해자가 용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가해자가 마음 깊이 용서를 빌고 사과했다는 사례는 찾기가 어렵다. 적어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이처럼 진정한 사과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누구든지 삶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수(잘못)을 하고 누구에겐가 피해를 입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피해가 크지 않다면 서로 악수를 나누고 술 한잔 나누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또 누구에겐가 삶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거나 여러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면 이는 술 한잔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물론 법적으로 처벌을 받았다고 해서 용서되는 것도 아니다.
용서와 화해에는 반드시 사과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과와 반성은 어떻게 해야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사과와 반성의 시작은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가해자는 우선 자신의 가해 내용에 대한 고백이 최우선이다. 사실 모든 사과가 어렵고 사과한다고 말하더라도 진정성을 의심받는 이유는 이 사실 고백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진정 한반도에 대한 침략의 역사를 반성한다면 침략했다는 사실 자체를 그대로 고백하고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구체적으로 전쟁의 과정에서 성노예 징집과 경제적 수탈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숨김 없이 이실직고 해야 한다.
고문 경찰 이근안이 사과를 할려면 고문한 내용과 그를 지시한 사람 뿐만 아니라 고문을 하게 된 잘못된 신념까지도 고백해야 한다.
유신을 사과하려면
유신을 하게 된 이유, 유신 과정에서 행했던 수없이 잘못된 행위, 당시 그 잘못된 행위들을 범하게 된 잘못된 신념을 먼저 밝히고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과의 시작이다.
사실을 인정했다면
그 다음 잘못된 신념이 바뀌게 된 계기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신념이 이제는 어떻게 바뀌었다고도 밝혀야 한다.
일본은 그 당시 군국주의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군사력에 기초해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 그 국민들을 헤친 것은 분명한 잘못이며 이제는 이웃 국가와 공존, 공영이 이웃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혀야 한다.
유신의 이유, 그 과정에서 행해진 잘못을 인정했다면 그리고 그 신념을 그대로 고백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아무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인권을 유린하고 독재를 해서는 안되며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믿음이 국가 발전의 기초라고 만 천하게 공개해야 한다.
사과를 하는 과정에서 혹 무릎을 꿇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그 내용이 분명하고 자신 있다면
그 방법이 어찌하더라도 피해자들은 기꺼이 용서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없이, 신념의 변화에 대한 고백 없이 내뱉는 어떠한 사과의 단어도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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