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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스티 네 잔 주세요”

당구장에 여러 명이 몰려 오면 그 중 한 명은 메뉴 통일을 시도한다. 어디서나 주문이 복잡해지면 골치가 아프다고 알기에 누군가 한 명은 꼭 나서서 하나의 메뉴로 통일해서 달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통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반드시 개성을 살리려는 주문은 나온다.

“난 주스”

“난 사이다”

“니가 뭔데 남이 먹을 걸 강요해~”

결국 옥신 각신 하더니 주스 1잔, 사이다 2잔, 아이스티 1잔이 주문된다.

언듯 요즘 젊은이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친구들과 우루루 몰려 당구를 치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대부분 당구장에서는 묻지도 않고 요쿠르트를 주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당구장 말고 식당엘 가도 누군가가 나서서 메뉴 통일을 외치던 친구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물론 각자 먹고 싶은 것들이 있었겠지만.... 메뉴가 복잡해지면 요리 시간이 올래 걸린다는 것을 알기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냥 동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밥 한 끼 시켜 먹으며 굳이 고집 세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개성과 다양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통일이라는 것은 결코 쉽게 이뤄지진 않는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바꿔보면 아무도 남의 말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굳이 고집부려야 할 일이 아닌데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다. 대의명분이 분명한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언젠가부터 리더십이 강조되는 세상이 됐다. 너도 나도 리더가 되려 한다. 하지만 모두가 리더가 될 수는 없을 터. 누군가는 팔로워가 돼야 한다. 리더의 의견을 존중하고 약간의 손해가 있더라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도 팔로워가 되지 않는 세상... 아무도 리더가 되지 못한다.

연승의 기억이 패배의 경험을 부른다

당구 뿐만 아니라 어떤 스포츠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연승이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도 질 것 같지 않고 승리의 자신감이 마음 속에 가득찹니다.

그런데 연승이 계속되면 누구나 이 연승의 이유가 뭘까? 이 연승의 비결이 뭘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나름대로의 연승의 비결을 찾아냅니다.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시작입니다.

손쉬운 일반화의 오류.

연승이 지속된 데에는 일단 충실한 연습이 절정에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약해지는 고리를 잘 만났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감입니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승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특히 당구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런 특징을 간과하고 최근 배운 스트로크, 두께를 보는 느낌 또는 특별한 경험을 승리의 원인으로 판단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하면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 집착이 시작됩니다.

굉장히 단순한 요인 하나로 연승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단순한 오직 하나의 이유라면 그것은 오직 자신감 뿐입니다.

이 이외의 요인에서 승리의 요인을 찾고 그 요인에 집착하는 순간 비로소 패배는 시작됩니다. 연승 뒤에 연패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당구를 치다 보면 특정 포지션이 굉장히 잘 맞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땐 정말 어떻게 쳐도 다 맞는 느낌입니다.

이럴 때로 스스로 분석하게 됩니다.

이런 분석의 끝에 대부분의 당구인들이 내리는 결론은 1. 요즘 참 잘 밀어쳐서 그래. 2. 최근 배운 파이브 앤 하프시스템대로 치니 다 맞네. 3. 스트로크를 바꾸고 시내루가 좋아졌어. 정도입니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면 집착이 시작됩니다. 1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에만, 2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2에만 집착합니다.

당구는 어느 한 가지만 잘 했다고 맞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스트로크 한 가지만 보더라도 큐 속도, 큐 깊이, 큐 스톱, 큐 속도의 변화(가속도) 등이 모두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공의 배치에 따라 적절한 스트로크를 해야 하는 것이지 모든 포지션에 획일적으로 적용 가능한 스트로크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반화의 유혹에 빠집니다. 승리에 도취되다 보면 이런 유혹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지만 한가지 원칙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는 없습니다. 



언제나 고민의 경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모든 포지션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공감각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머리의 이론적 분석은 가급적으로 내려놓고 몸의 느낌을 믿어야 합니다. 가상의 트랙을 그려 놓고 그 트랙으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지 느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어느 것 하나라도 불편함이 느껴진다면(키스, 어려운 두께, 구사하기 힘든 회전량 등) 그걸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것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두꺼운 자신감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승리의 비결이고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삶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사업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모든 순간에 하나의 절대 원칙을 세우고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열린 눈으로 나머지를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들어 너무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에 몰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것에 몰입한 것보다는 더 낫다는 쪽으로 생각하면 맞지만 결국 행복 그 자체도 거기에만 몰입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공감각적으로 동물적 감각 그 자체를 끌어올려야겠습니다.


당구, 쳐야 하는대로 치지 말고 공이 맞게 쳐야 한다

당구는 그 특성상 친구끼리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면서 시작합니다.

때로는 아빠가 아들, 딸의 손을 잡고 오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당구를 가르쳐주겠다는 아빠의  열정은 쉽게 식습니다.

아들, 딸이 이미 충분히 배워 온 다음에 꾸준히 같이 오는 경우는 있지만 입문 수준에서 실력 차이가 상당한 상태에서 아빠가 꾸준히 가르쳐주는 경우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없습니다.

이는 꼭 아빠와 아들 사이뿐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고점자(알공 200점 이상)도 당구 입문자를 데리고 세번 이상 당구장을 찾지 않습니다.

때문에 당구를 입문하는사람들은 대부분 50점 또는 80점 정도 수준입니다. 100점만 돼도 아주 인내력이 강한 친구이거나 친분이 아주 대단한 경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당구는 50점한테 30점이 배우고 100점한테 50점이 배우고 200점한테 100점이 배우는 구조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신이 30점일때 배운 당구는 100점만 돼도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100점 시절 배운 당구는 200점이 돼면 고스란히 휴지통에 버려야 합니다. 물론 과거에 배운 습관을 하루 아침에 버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은 자신이 과거에 50점 시절에 100점한테서 배운 정보를 금과옥조로 여깁니다.

아마도 지금 자기 자신보다도 못 치는 친구에게서 배운 정보일텐데도 불구하고 10년 전 배운 기억을 그대로 고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로는 습관이 돼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만히 관찰한 결과 습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번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결코 바꾸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구는 맞게 쳐야 합니다. 어떤 이론이나 시스템에 따라 치는 것이 아니라 공이 공을 맞게 치는 것만이 오직 진리입니다.

많은 시스템과 이론을 배웠다면 이를 내재화하고 마음 속에서 묵혀서 나의 감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임을 치는 순간에는 머리로 계산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서 최대한 그대로 발휘해야 합니다.





모든 판단 근거를 ‘원래’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원래인지를 물으면 답변을 못합니다. 원래가 뭐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원래’를 따지곤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원래인지는 모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자신이 과거에 알고 있는 것(그 근거가 무엇이던간에) 을 원래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그것을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합리적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최첨단 과학이라는 각종 이론들도 하루 아침에 부정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과학시간에 열심히 배웠던 뉴턴은 물론이요 어려워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조차도 벌써 부정되는 시대입니다.

사람은 습관적으로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기 십상이지만 이런 기준들은 틀리기 마련입니다.

비단 과학분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효’라고 하는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외웠던 신체발부 수지부모 따위의 구절은 고사하고 엄마 아빠가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효였던 10년 전의 개념도 이제는 옳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꾸 옳다고 하는 것을 머리 속에 넣어두면 사고는 경직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 들어오려고 해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원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방법은 유연한 사고입니다. ‘원래’ 따위에 구속되지 말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져야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흡수하고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배우지도 받아들이지도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배우는 이 내용도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또 새로운 정보로 대체될 것이라는 여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강대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봐서도 안 됩니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봐서도 안 됩니다. 오직 텅 빈 마음으로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 강할수록 자신으로 하여금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하는 강제성도 강해지지요. 이념가들이 변화하지 못하다가 실패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구는
쳐야 하는대로 치는 게 아니라 맞게 쳐야 하는 것입니다.

당구를 잘 이기는 사람은?

당구를 치면 어떤 사람이 잘 이길까요?

1) 배짱 좋은 사람
2) 악착같은 사람
3) 성실한 사람

제가 오랫동안 당구장을 하면서 관찰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어떤 친구는 언제나 승률이 60% 근처에 있고 어떤 친구는 언제나 40% 근처에 있었습니다.

당구는 실력에 맞추어 수지를 조정합니다.

당연히 잘 치는 사람은 높은 점수를 놓고 잘 치지 못하는 사람은 낮은 점수를 갖습니다. 때문에 승률은 언제나 50% 근처에서 형성됩니다.

이런 수지는 전국적으로 어느정도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쳐도 어느정도의 균형 승률이 유지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승률을 유지하는 친구가 있고 언제나 패배에 마음아파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게임을 갖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실력에 대한 평가에 더하여 승률에 대한 평가도 수지에 반영됩니다.

때문에 승률이 높은 친구는 언제나 친구들에게 등떠밀려 수지가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지를 조정해도 또 몇 게임이 지나고 나면 결국 배짱 좋은 친구가 높은 승률을 유지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배짱 좋은 친구들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친구들에 비해이길 확률이 높습니다.

여기서 배짱이 좋다거나 악착같다거나 성실하다는 표현은 사회적 관계가 좋고 나쁘거나 도덕적 우위를 조금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들 무난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인간관계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성격차이는 언제나 승부에서 나타납니다.

배짱 좋은 사람이란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입니다.

굳이 나쁘게 표현하면 단순 무식한 사람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체로 이론적 수준은 그리 높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살펴보면 그마저도 자신의 이론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말로는 끌어쳐야느니 밀어쳐냐느니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렇게 치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자신이 잘 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고수들도 이들을 보고 당구를 잘 친다고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승률이 높아도 수지가 무작정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확신이 있습니다.
옳든 그르든 자기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데 아주 충실합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야 공이 맞는지를 감각적으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을 치는데 꼭 필요한 만큼만의 정보를 이용합니다. 아주 작은 정보와 아주 작은 판단을 아주 정확히 수행합니다.

때문에 이들은 실패했을 때도 스트레스가 적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이론에 빈틈이 아주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경기가 박빙으로 흐를 때 배짱 좋은 사람들은 더욱 판단을 단순화합니다. 결국 스트레스 경쟁에서 언제나 우위를 차지합니다.

악착같은 사람도 승률이 높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체로 연습을 많이 합니다. 지는 것이 싫기 때문에 연습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합니다. 때문에 대체로 실력 자체가 높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진짜 빛나는 것은 승부의 순간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본인 스스로 집중력을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이기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승부 자체에 집중합니다. 승부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나아가 승리의 단맛을 철저하게 만끽합니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운동선수 출신들이 이런 부류가 많습니다. 운동선수가 이렇게 훈련되는 것인지, 이런 성격이 운동선수를 많이 지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무슨 활동으로 운동을 했던지 하다못해 태권도 학원을 다녔던 친구들도 이런 성격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언제나 앞의 두 부류의 먹잇감이 되곤 합니다.

자주 진다고 해서 패배가 익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고 나면 언제나 속상합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공부와 연습 뿐입니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연습도 제일 많이 합니다. 당연히 이들을 바라보는 고점자들은 이들을 가장 실력이 높다고 인정합니다. 때문에 이들은 대체로 프라이드가 높습니다. 승률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수지는 계속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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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실력도 없고 제대로 치지도 못하는 사람이 승률이 제일 높은게 당구입니다.

그렇지만 모두들 한번이라도 더 이기기 위해 당구를 연습하고 또 연습니다.

당구는 꼭 이기기만을 위해 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모두다 열심히 살지만 정작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부지런한 사람보다 배짱있는 사람,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돈 많은 사람만 행복한 것은 아니니까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높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꼭 성적이 실력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돈이나 성적이 아니라 행복과 실력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