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벌식 연습 보름여. 두벌식도 버벅버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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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불인: 세벌식 자판 처음 연습기

세벌식 자판 연습을 시작한지 그새 18일이 지났습니다. 물론 지금 이 글은 세벌식으로 치고 있고요.

현재는 날개셋으로 했을 때 대략 140타 정도가 나오는군요.

하지만 이처럼 글을 보지 않고 생각하면서 칠 때는 그 속도가 더욱 떨어져서 짐작컨데 아마 60타 정도나 나올지 모르겠군요.

진짜 문제는 두벌식도 거의 세벌식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두벌식으로 쳐 보다가 차라리 세벌식이 낫겠다고 치고 있는데 정말 속 터지는군요.

연습을 시작한 이후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하루에 한두 시간씩 연습했습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거의 습관적으로 두벌식으로 나와서 이성적으로 이를 제어하느라고 혼났습니다. 그러던 것이 한 10일 정도 지나니 한 80타 정도에 이르면서 꽤 안정이 되더군요.

한 번 연습할 때마다 30~60분씩 연습했는데 한 번 할 때마다 분당 속도가 5정도씩 꾸준히 늘더군요. 그런데 100타가 넘어가면서는 두벌식도 헷갈리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더니 지금에 와서는 두벌식이나 세벌식이나 별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세벌식은 써 보니 자주 쓰는 글자와 그렇지 않은 글자간 차별을 확실히 둔 것이 특징이네요. 자주 쓰는 키에 대한 분석이 잘 되 있고 그만큼 편한 자리에 잘 배치를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쓰이지 않는 키는 따로 맘먹고 움직여야 할 정도로 불편한 자리에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이 이중받침인데 그 외에도 초성 ㅋ이나 중성의 ㅑ, 종성의 ㅎ 등은 꽤 자주 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멀리 있네요.

그리고 키 배치에 있어서 초, 중, 종성의 나름대로 배치 기준이 있지만 더 철저한 연계도 아쉽네요. 예를 들면 두벌식에서는 아랫줄에 탁음이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어서 연상기억이 훨씬 쉬운데 비해 손에 익히기가 쉽지 않네요.

세벌식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모아치기인 것 같네요. 모음과 자음을 순서를 바꿔 입력해도 글자가 제대로 입력되기 때문에 참 편하네요. 하지만 모든 입력기에서 다 되는 것은 아니네요. 따로 프로그램이 있어야 되나 봐요. 한글셋에서는 문제 없이 됐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블로그 입력에서는 되지 않는군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아쉬운 것은 세벌식에도 여러 안이 있어서 무엇을 익혀야 할지 난감하네요. 지금은 그 이름때문에 세벌식 최종을 익혔는데 오늘에서야 보니 새세벌식이라는게 있는데 그게 더 마음에 드네요. 세벌식에 대해서도 빨리 연구가 일단락 돼서 통일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쓰다 보니까 단점 위주로만 정리된 면이 있군요. 하지만 장점도 그만큼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 더 연습하면서 장점을 모아서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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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세브란스 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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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세브란스병원이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을 고쳐 붙이고 새로운 고객 서비스를 선언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은 26일 오후 2시 병원 대강당에서 ‘강남세브란스 BI(Brand Identity)선포식’을 갖고 지난 사반세기 영동세브란스 시대를 마감하고, 혁신적인 고객서비스를 제공하는 고객만족도 최고의 강남세브란스로 새롭게 태어나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이날 선포식에서 방우영 이사장과 김한중 총장은 각각 기념사와 축사에서 우리나라 의료 1번지로 일컫는 서울 강남지역에서 최고의 병원으로 나아가 국내 최고의 병원으로서 125년 연세의학을 전파하는 구심점이 되어주기를 당부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은 전 고객 발레파킹서비스와 정시진료제를 비롯한 혁신적인 고객서비스 신설 및 강화, 암전문병원 신설 및 건진센터 확장을 통한 차별화된 최고의 진료서비스 제공, JCI인증 획득을 통한 글로벌 의료기관 구현을 통해 ‘명품병원’시대를 열어 가겠다고 천명했다.

 한편, 지난 1983년 연세대 의과대학 영동세브란스병원으로 서울 강남권 최초의 대학부속 병원으로 세워져 현재 37개 진료과에 800여 병상, 암 ․척추․치과 등 3개 전문병원과 내분비당뇨병․ 심장혈관 등 5개의 전문센터를 설치하고 1,800여명의 교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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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7이 다운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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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7이 다운됐다. 

한번 그러더니 자체 복구기능으로 해결이 되더니만 하루가 지난 오늘은 같은 동작이 반복된다. 

부팅 과정에서 까만 바탕에 별 네개가 날아와 반짝거릴 때, 갑자기 영어로 잘 모르는 단어가 뜨면수 순간 불루스크린으로 넘어가고 숫자가 막 증가하다가 재부팅이 돼버리고 마네요...

그리고 재부팅을 시키면 또 복구 기능을 선택하라고 하고 복구 과정을 거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네요..

이제 이걸 다시 깔아야 하는 건지, 아직 판단이 잘 서질 않네요..

혹시 이런 문제 경험 하신 분... 답변 부탁드릴게요..

아!!  Window 7이여...

존엄사 판결 결국 대법원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존엄사 판결과 관련, 고등법원의 판결에 불복하고 대법원에 상고하기로 했다.


세브란스병원측은 24일, 존엄사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한다면서도 인간의 생명은 합리성이나 실용성에 근거해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이와 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세브란스병원은 이번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존엄사를 인정하고 입법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세브란스병원은 이어 이번 환자는 통증에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혈압도 안정적이고 튜브 영양공급에 거부감 없이 잘 되고 있다며 생명은 유지할 수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경우 환자는 수시간 이내에 사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제거할 수 없다며 생명의 존엄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키겠다는 것이 한결같은 신념이라고 밝혔다.


세브란스병원은 환자의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료의 특성과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보호자의 고통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대법원의 판결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고 밝혔다.

관련 포스트

 존엄사법 발의, 그 내용은?
 존엄사 인정 판결, 쟁점과 논란
 존엄사, 보호자의 대리 의사 표현은 부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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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본 가장 아름다운 민속촌 성주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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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읍내 인근 성주 한개마을

성주는 역시 알려진대로 참외의 마을이었다. 들녘은 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대부분이 밭이었다. 또 밭의 대부분은 비닐하우스로 덮여있었다. 물론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보나마나 대부분 참외밭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반갑게 맞이해준 안내 아주머니의 설명대로 마을은 한 눈에 보기에도 명당이었다.



야트막한 안산이 마을 뒤쪽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좌청룡 우백호가 좌우로 지켜주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머지 않은 곳에 배가 다닐 정도의 내가 흐른다고 하니 배산임수까지 갖춘 지형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찾은 날은 날씨까지 봄빛이 따뜻한 날이어서 그 오붓함인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정번호 중요민속자료 제255호
지정연도 2007년 12월 31일
소재지 경북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 일원
시대 조선시대
면적 843,714㎡




마을은 말 그대로 전통 양반촌이었다. 보아하니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기와 지붕이나 토담길을 수리, 복원하는 것 같았다. 대체로 단정하게 잘 정돈돼 있었고 요란스럽지 않았다. 마을 위쪽으로 갈 수록 큰 집이 많았고 집의 배치도 복잡해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이 나오고 다시 대문이 있어 안채와 연결됐다. 또 다른 쪽으로는 또 다른 입구가 있어 본채와 쪽문으로 연결됐다. 아마도 자식들이 분가를 하면서 이웃에 집을 지어 주고 쪽문으로 연결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맘에 드는 것은 아직 관광단지로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정책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인지 각종 식당이나 기념품 가게 등이 하나도 없어 구경하는 사랑의 기분을 헤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가본 어떤 민속촌이나 전통마을보다도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고 정말로 한 번 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마을의 기념할만한 종택들을 대부분 '하회댁' 등의 택호를 가지고 있었다.

택호란 것은 말 그대로 집에도 이름을 붙였다는 것인데 사람을 부를 때는 보통 안주인을 부를 때는 그냥 택호를 부르고 바깥주인을 부를 때는 ㅇㅇ양반, ㅇㅇ어른하는 식으로 불렀다. 이것이 말 그대로 존칭이 됐다.

택호를 붙일 때에는 보통 벼슬이 있을 때는 벼슬을 따서 '진사댁' 등으로 불렀고 벼슬이 없을 때에는 처가의 고향을 따라 (보통 면 단위) 붙였다.

한개마을에는 진사댁, 교리댁, 북비고택, 월곡댁, 하회댁, 극와고택, 한주고택, 북비고택, 한주종택 등이 있었다.



마을 맨 뒤쪽 한주종택의 사랑채는 누구나 한 번 앉으면 시 한 수 쯤은 절로 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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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법 발의, 그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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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법이 한나라당 신상진의원에 의해 지난 5일 발의됐다.

신상진 의원은 "현대 의학으로 회복가능성이 거의 없고 치료할 수 없는 환자에 한정하여, 단지 인위적으로 생명만 연장하는데 불과한 생명유지 장치를 환자 스스로가 보류하거나 중단할 수 있도록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고, 이러한 의사결정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입법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신상진법은 말기 환자는 연명치료 시술 거부 등의 의사를 담은 '의료 지시서'를 작성, 본인이 원하는 의료기관에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의료지시서를 작성할 때에는 재산 상속을 받을 사람이나 진료비를 부담해야 할 사람이 아닌 2명의 증인을 입회하도록 하고 있다.

또 의료지시서를 작성할 때 의사는 말기 환자의 상태를 점검해 본인이 의사 능력을 갖췄는지, 본인의 자발적인 의사가 맞는지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

신상진법은 또 의료지시서 등이 없더라도 유언 등의 방법으로 말기 환자의 진정한 의사가 확인될 경우에는 기관윤리위원회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신상진법은 담당의사를 포함해 2명 이상의 의사가 말기환자임을 확인하고 의료지시서에서 연명치료 중단을 원할 경우에는 연명치료를 보류, 중단하도록 하고 있으며 담당의사가 부당하게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병원이 담당의사를 바꿔서라도 연명치료를 중단하도록 하고 있다.

신상진법은 반면 연명치료 중단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안락사에 대해서는 처벌조항을 두어 금지했으며 동시에 말기환자에 대한 자기 의사에 반하는 연명치료를 계속 한 경우에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법안은 또 이 법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한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할 수 없도록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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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기환자가 어떻게 의료지시서를 작성할 수 있는지, 실질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다. 법안은 특히 가족이 아닌 2명의 증인을 입회하도록 했는데 지나친 규제는 아닌지, 그냥 병원측, 본인의 의사만 분명하면 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다. 물론 검증을 위한 제3자가 필요하다면 이를 위한 또다른 제3의 기관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직 법안은 전체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듯 하다. 앞으로 상임이사회 논의를 거치면서 훨씬 더 체계적으로 갖추어 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다른 의원들의 발의도 있어서 비교 토론이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튼 입법기관에서 존엄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이제는 죽음의 과정에 대한 지나친 의료의 개입은 오히려 비윤리가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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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 인정 판결, 쟁점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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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 항소 없이 대법원 판겨 받는다.
국내 첫 존엄사 인정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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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잘생긴 전탑, 칠곡 송림사 5층탑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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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안동 방향으로 5번 국도를 따라 올라 가다가 한티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송림사.

송림사는 원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가람 배치랄 것도 없이 대웅전과 양쪽에만 건물이 있는 소규모 절이었다.

하지만 마당의 탑은 보는 이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종 목 보물 제189호

명 칭 송림사오층전탑(松林寺五層塼塔)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시대 통일신라

송림사탑은 전탑이지만 매우 간결하고 잘 생겼다.

탑은 1층의 얇은 기단 위에 바로 탑신을 올렸다. 그리고 특별한 장식 없이 5층을 쌓고 바로 상륜부로 마무리했다.

아무런 특징도 두드러짐도 없지만 안동 임청각 앞에 있는 신세동 7층전탑이나 안동역 구내에 있는 동부동 5층 전탑에 비해 잘생겼다고 느껴진다.

역시 탑의 아름다움은 화려한 장식보다는 1층에서 마지막 층까지 올라가는 적절한 비율의 배분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송림사탑은 층간 약간의 불균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납작해보이거나 너무 날씬해 보이는 감이 없이 안정미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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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라이브파이어를 이용한 트랙백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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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라이브 파어어를 이용한 트랙백 연결 연습.

원본 글의 트랙백 주소를 복사해다가 스크라이브 파이어에서 '선택사항' 탭에 가서 트랙백 URL:란에 붙여넣고 나머지는 디폴트 상태 그대로인데 '핑 사용'에 체크하고 '사용자 지정'을 선택한 뒤 'Technorati'에 체크했습니다.

그리고 게시..

트랙백 인용하기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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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에 트랙백을 붙일 때는 이렇게 하면 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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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커스 트랙백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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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커스 트랙백 설치 잘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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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아고라를 대신 할 다우버를 추천합니다


다우버를 아세요?

이름만 들어도 다음과 네이버 합성어구나 눈치 챌 수 있네요.

처음에 이름만 들었을 땐 '그냥 누가 장난처럼 만든 거구나!'하고 생각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문제는 바로 공론의 장인 아고라 폐쇄에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바로 열린 의사표현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헌법에 민주공화국을 표방하고 있으며 21조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21조 2항에는 "②언론ㆍ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ㆍ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언론, 출판의 자유는 허가나 검열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도록 차단돼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회, 결사의 자유도 검열은 가능하돼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글쓰고 말하기는 완전히 자유이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것이 아무 말이나 막하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이 정부는 이런 헌법을 한번 꼼꼼이 읽어보기나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통제부터 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학생이 나서서 이런 토론의 광장을 만들고 나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우버를 만든 무명학생이라는 님은 그래도 '다우버 광장에 첫 글을 올립니다'라는 글을 통해 나름대로 토론 광장의 운영 규칙을 만들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 각 토론방 별 베스트 상자 부활
  • 베스트 선정기준의 투명성 확보
  • 글 발표 제한 - ID 당 1시간에 1개, IP 당 24시간에 30개
  • 댓글 제한 - ID 당 하루에 30개, IP 당 하루에 50개
  • ID 당 10개까지 글의 초안 저장 가능
  • 자신이 찬성, 반대한 글의 목록을 확인 가능 (일종의 스크랩 북 효과가 있음)
  • 닉네임 중복 불가 (그리고 닉네임 바꾸면 예전에 썼던 글, 댓글들의 이름도 다 바뀜)
그 기준이 얼마나 적절한지 제가 미처 판단할 능력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정부가 계속 백성들의 입막음을 하면서 '소통'을 얘기할 때 또 똑똑한 백성은 이렇게 열린 광장을 통해 '소통'을 이뤄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쪼록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 분은 '다우버'를 이용하시면 속시원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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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돌담마을과 제2석굴암 삼존불


군위 돌담마을은 그 입구의 노송 숲이 더 멋졌다. 마을 입구의 돼지국밥집도 맛있었다.


마을은 아직 관광지로는 자리잡지 못한 듯 했다. 아직 마을 정비도 되지 않았고 딱히 무엇을 봐야 할지 조금 애매했다.

그래도 울타리를 모두 돌담으로 쌓아놓은 모습은 무척 특이했다.



마을 안에는 대율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었고 절 마당에는 입상이 서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았고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기준이 무엇인지 '보물'이라고 했다.

손은 지나치게 컸고 얼굴은 코만 뚜렷하고 입, 눈, 귀는 흔적만 있었다. 하체는 상체에 비해 지나치게 부실했으며 발은 마치 발바닥을 보여주는 듯했다.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상이라고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급히 찾은 화장실은 라디오가 켜져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가 흘러나왔다.

거기에서 다시 10여분을 달리니 군위삼존불상 입구가 나왔다. 좁은 입구를 각종 음식점들이 막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삼존불은 입구의 요란함을 쫓아가지 못했다.



높은 바위 절벽의 자연동굴 속에 세워진 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사례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불상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계단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입구는 잠겨 있었다. 경주 석굴암의 유리벽도 잘 이해되지 않는데 이곳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잠궈뒀는지 알 수 없었다. 신도들은 멀직이 단 아래에 반들반들한 대리석을 깔아두고 거기서 예배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탑인지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조형물을 만들어 세워뒀다.



똑딱이 카메라의 믿을 수 없는 줌을 이용해 찍은 사진에 나타난 삼존불은 기대보다는 훨씬 잘생긴 불상이었다. 경주 석굴암의 불상과 같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었고 대체적인 모습도 비슷했다. 물론 완성도가 경주 석굴암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화강암을 다음은 정성은 지극해 보였다. 그런데 좌우의 협시보살은 나중에 따로 가져다 세운 것인지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고 본존불에 비해 지나치게 작았다.


제2석굴암 마당에는 비로전이 지어져 있었우며 그 옆 마당에는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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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 신현준, 채정안 고대 구로병원에서 '스타데이'


고대 구로병원(원장 변관수)은 지난 17일 남촌드림클래스에서 배우 신현준, 채정안과 함께하는 'STAR DAY' 행사를 가졌다.

신현준, 채정안은 고대 구로병원에서 촬영하고 있는 SBS 드라마 ‘카인과 아벨’의 두 주연 배우고 활약하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이번 ‘STAR DAY’ 행사에 함께하게됐다. 이번 행사에서는 전문 미술치료사와 함께 두 배우, 소아환아, 의사, 간호사 모두 힘을 합쳐 ‘도움의 손길’을 주제로 미술 작품을 만들었다. 이번 미술치료에서는 각자의 손 모양과 ‘약속’, ‘나비’ 등을 여러 사람이 함께 표현한 손 모양을 석고본으로 떠서 미술 작품을 구성했는데, 유명 배우들과 함께한 소아환아들은 연신 즐겁고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미술치료 후에는 두 배우들이 준비해온 티셔츠, 목도리, 빵 등의 선물을 소아청소년과를 비롯한 병원에 입원한 소아환아들에게 나눠주고, 병원을 찾은 환자, 보호자들과함께 단체로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신현준, 채정안 두 배우는 어린이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면서 적극적으로 환자들에게 다가서는 모습을 보여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미술치료를 비롯한 행사 내내 밝고 따뜻한 미소로 어린이들을 대했던 채정안은 “아직도 엄마 품에서 놀아야 할 아이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앞으로 틈나는대로 자주 병실을 찾고 싶다”며 소감을 밝혔다. 시종일관 재치있는 이야기들로 어린이들과 참석자를 즐겁게 했던 신현준 역시 “아직 장가를 안가서 아기를 키워본 경험은 없지만 소아환자를 둔 부모의 심정을 알 것 같다”며 어린이들의 쾌유를 기원했다. 극중에서 외과의사 배역을 맡은 신현준과 심장병 환자로 출연하는 채정안은 “환자들의 고통과 의료진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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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이용 전립선암 수술, 개복수술보다 결과 우수

다빈치를 이용한 전립선암 등 비뇨기계 로봇수술이 개복수술이나 복강경수술보다 더 높은 결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나군호교수(비뇨기과)가 최근 다빈치를 이용한 로봇수술 500례를 달성했다. 이는 2005년 국내 첫 로봇수술이 도입된 이후 개인으로 최고기록이다.

나군호교수의 로봇수술은 주로 전립선암을 중심으로 한 신장암, 방광암 등 비뇨기계 암이다. 나교수의 총 513건(2009년 2월 17일 현재)의 다빈치 로봇수술 중 전립선암이 435건, 신장암 45건, 요관암 16건, 방광암 13건이다.

특히 조기전립선암의 경우 완치율 96%와, 1년 이내에 85%에서 배뇨기능이 회복되는 등 수술 결과에 있어서도 세계적으로 톱클래스의 성적이다. 일반적으로 전립선암 수술시 소변조절능력 회복률은 개복수술시 75%, 복강경 수술시 80%로 보고되고 있다.

나 교수는 국내 의사로는 드물게 지난해 체코 및 중국의 의사면허를 발급받아 프라하에서 열린 유럽로봇학회, 북경 인민해방군병원, 세계내비뇨기과학회 등 국제학회에서 초청받아 독창적인 수술기법을 소개했다. 뿐만 아니라 로봇수술 4년째인 올해 초에는 나교수는 로봇수술의 종주국인 미국 아이비리그의 코넬대, 콜럼비아대, 펜실바니아대는 물론 세계최고병원인 존스홉킨스병원에서 로봇수술을 강의 및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 지난달 의료선진국인 일본 오카야마대의 아라키 교수가 2개월간 나교수에게 로봇수술을 트레이닝 받고 돌아가는 등 올해에도 필리핀 등 해외 각국에서로봇수술을 배우려는 장기연수가 이어지고 있다.

나 교수는 “남성의 전립선 및 신장 등은 해부학적으로 수술이 어려운 위치이고 중요한 신경과 혈관이 밀집해 있다”며 “3차원 입체영상으로 수술부위를 보며 손 떨림 없는 정교한 로봇수술을 통하면 환자에게 좋은 결과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 교수는 2002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에 근무당시 로봇을 처음으로 접하고 향후 수술의 새로운 방향으로 인식하여 정식으로 로봇수술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2005년 세브란스 새병원 개원과 함께 로봇수술기를 국내에 도입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지난해 아시아 최초로 로봇수술을 배우는 다빈치 트레이닝센터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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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탑리 5층 모전탑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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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을 깎아 이뤄낸 전탑과 목탑의 완벽한 조화


모전석탑이란 돌로 벽돌탑 모양을 흉내낸 탑.
(경주 분황사탑, 제천 장락리 7층탑, 음성 5층
탑 등)

▣ 지정번호: 국보 제77호

▣ 소재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
▣ 시대: 통일신라 전기
▣ 크기: 높이 9.6m



매우 조용하게만 느껴지는, 햇살의 따스함보다도 아직 남아있는 공기의 찬 기운이 더 느껴지는 날이었다.

안동에서 출발, 잠깐 새 큰 길에서 빠져 왕복 2차선의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높은 고개를 지나는 것도 없고 완전한 평야지대도 아니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달리던 길이 잠깐 너른 지대로 접어드는 순간, 마치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마을. 바로 의성 탑리, 금성면의 면 소재지였다.

탑은 마을 맨 안쪽, 여중학교와 바로 울타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탑리 5층탑은 한눈에 아주 잘 생긴 탑이라는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미끈한 화강암 탑(석탑)들이 주는 세련함에 비해 대체로 전탑이나 모전탑은 잘생겼다는 느낌을 받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특히 건물의 지붕 부분에 해당하는 '낙수면'이 마치 계단처럼 생긴 것이 모전탑의 특징이다.

하지만 탑리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생겼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얇은 지대석 위에 기단부는 1층, 감실을 둔 1층 탑신의 문은 열려 있었고 5층의 옥개석을 올렸다. 안타깝게도 상륜부는 유실됐고 후대인들이 얹었음직한 뭉툭한 돌이 올려져 있었다.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이라고 할만한 경주 석가탑이후 2층 기단이 주를 이루는데 기단이 1층으로 비교적 얇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로써 석가탑보다는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분황사 탑보다는 훨씬 정형에 더 가까워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건립 시기는 통일신라 초기를 추측되는 듯 하다.

탑의 가장 큰 특징은 낙수면을 전탑처럼 계단식으로 조성했다는 것과 동시에 기단부와 탑신부의 모서리를 마치 목조건축물의 기둥처럼 그대로 재연해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탑신부의 기둥(우주)은 마치 사포로 다듬은 듯이 매끈하게 처리돼 있고 눈에 띠기 어려울만큼 살짝 엔타시스를 가미해 안정감을 더했다.

특히 탑신부의 기둥머리와 이를 받는 창방은 매우 부드러운 선으로 다듬어져 마치 화강암을 목재를 다루듯이 정성을 들였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해 특히 훼손이 많이 돼 있어 더욱 안타까울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목조건축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은 또 있었다. 바로 처마의 선이었다. 처마의 아래쪽 선은 거의 완벽한 직선이었지만 윗쪽 선은 마지막 부분에서 아주 조금씩 위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탑의 전체적인 체감은 안정감과 웅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지나치게 뾰죽하면 안정감을 잃을 수 있고 지나치게 납작하면 자칫 세련미가 떨어질 수 있는대 규형감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오히려 석가탑보다도 후에 나온 탑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탑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 설명은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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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하락장 시작, 현금 확보 후 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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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인 주식 하락장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일단 현금을 확보해 두고 기다릴 작정입니다.

한국의 탑 개관

경북 남부지방 일대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 도중 가장 많이 본 것이 바로 탑입니다.

대학 다니던 시절 받았던 몇 안 되는 A+학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탑'에 대해 발표를 하고 받았던 것인 만큼 탑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탑을 보니 기억나는 것보다 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썼던 레포트를 찾아봤습니다. 거의 발굴에 가까운 정도의 수고수고를 통해 드디어 찾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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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탑(塔)


I. 머리말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전국적으로 석탑이 많다. 이렇듯 석탑은 한국미술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불교조형미술품 중에서도 그 주류인 탑파의 중심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품질이 우수한 화강암이 많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적인 유적 · 유물가운데 석조미술품이 다른 어느 것보다 그 수효가 단연 많다. 물론 석조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점판암이나 대리석 등으로 이루어진 석조미술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보다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훨씬 많으며 실제로 조사된 수에서도 화강암으로 된 것이 훨씬 많다.

이러한 현상은 화강암이 다른 암석보다 풍부하였고 특히 암질이 채석(採石)과 치석(治石)을 하기에 손쉬워 여러 가지 조각과 건조물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조나 지물(紙物), 토제(土製), 금속제(金屬製) 등의 여러 조형물이 재난을 당할 때마다 모두 불에 타버리고 파괴되어 때로는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와는 달리 석조물은 내구성이 있고 화재에도 잘 견디기 때문에 다른 어느 유물보다도 많은 수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많은 조형물이 석재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도 손쉽게 다량으로 채취되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불교가 들어온 이후부터는 불교미술품 전반에 걸쳐서 화강암이 그 조성재료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불교의 융성은 곧 장엄미(莊嚴美)를 갖춘 여러 가지 조형물의 조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때 다량으로 필요했던 화강암 등의 석재가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충당되었고, 이러한 연유로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탑이 건조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탑의 기원과 시대별로 탑의 특징과 대표적인 탑의 양식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II. 탑의 일반

가. 탑의 개념과 목적

탑이란 갖추어 말하면 탑파(塔婆), 즉 범어(梵語, Sanskrit)의 스투우파(Stūpa), 또는 팔리(Pli)어 투우파(thūpa)의 음사(音寫)에서 유래된 약칭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사리(舍利, Sarira)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이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불도들은 인도의 장례법에 따라 화장의 예를 갖춤으로써 그 유신(遺身)인 사리를 얻게 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구조물을 쌓은 것이 바로 탑파, 즉 불탑(佛塔)이 되었다. 그러므로 불탑은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탑의 어원에 대하여는 사리의 봉안유무에 따라 탑파, 또는 지제(支提, Chaitya)라고 하는 별개의 용어가 있다. 먼저 사리를 봉안한 탑을 ‘스투우파’라고 함에 비하여 사리가 없는 탑을 ‘차이티야’라고 구별하기도 하였다. 즉 앞의 것은 방분(方墳) · 원총(圓塚) 또는 고현처(高顯處) 등의 뜻이 있고, 뒤의 것은 영묘(靈廟) · 정처(淨處) · 복취(福聚) 등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스트우파’는 부처님의 신골을 봉안하는 묘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비하여 ‘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자는 순전히 불사리(佛舍利) 봉안처로서의 탑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석가와 관계되는 역사적 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석가의 사리는 양적으로 제한된 것이므로 차츰 사리신앙에도 변화가 있었다. 석가의 몸에서 출현한 진신사리(眞身舍利)뿐 아니라 불경(佛經)인 법신사리(法身舍利)를 봉안한 모든 탑이 있어서도 단순한 탑이란 용어로써 통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불사리를 봉안한 탑과 함께 불교의 모든 기념물적인 성격을 지닌 ‘차이티야’까지를 통틀어서 넓은 의미로서 탑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탑파 건립의 목적은 사리신앙에 있으므로 이는 불상과 함께 불교의 양대 예배대상으로서 널리 추앙되었다. 즉 불사리를 지닌 불탑과 부처님의 품격을 형상화한 불상이 가람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소위 당탑가람(堂塔伽藍)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불사리의 전래가 바로 탑파 건립의 직접적 동기가 되고 있으나 이들은 호국(護國) · 호법(護法) 또는 기복(祈福)과 같은 시대적 상황, 그리고 종교적 동기에 연관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이곳에 탑파 건립의 외형적 동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신라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도참사상과도 더욱 밀접한 연관을 지니면서 지세(地勢)나 형국(形局)에 따라 산천을 돕고 보호하려는 성격 아래 조성되었던 사례도 일단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한국적 특징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리라 본다.

나. 탑의 기원과 전개

한국의 탑은 어떠한 경로와 내용을 가지게 되는가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과 함께 현존하는 유적․유물에 대하여 짐작할 뿐 보다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와 함께 탑의 건립도 시작되었으며 양식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전수한 중층(重層)의 목탑형식이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구체적인 물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현존하는 유물․유적에 의하면 한국 탑의 기원은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삼국 말기의 시기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석탑을 가리켜 「始原石塔」이라 부르는데 백제(百濟)의 것은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五層石塔과 익산의 미륵사지(彌勒寺址) 多層石塔을 들 수 있으며 고신라(古新羅)에 있어서는 경주 분황사의 모전석탑(模塼石塔) 1기를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양국의 석탑은 그들이 석재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그들이 각기 지니고 있는 양식은 서로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백제의 石塔은 石塔발생 이전에 유행했던 목조탑을 모범으로 삼아 석재로서 번안함으로써 최초의 석탑을 건립하였고 이와는 달리 경주의 분황사탑은 전탑을 모범으로 삼아 안산암을 벽돌 크기로 작게 절단하여 쌓아 올린 점에서 그 양식의 특색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목탑이 지닌 내구성에 대한 취약점을 보완하는 한편 탑파가 지향하는 종교적 영원성을 석재로서 완성한 탑이다.

그후 삼국통일을 계기로 그 발생사유를 달리하는 목탑계와 전탑계의 석탑양식이 하나로 종합됨으로써 새로운 양식의 석탑을 낳았으니 오늘에 전래하는 신라통일 초기인 7세기 후반의 작품에서 그 事例를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신라의 석탑은 典型的인 양식에서 독특한 한국적인 양식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출발한 탑파형식은 그 전파국에 따라 각기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다. 그것은 불상과 같은 엄격한 규범 속에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건축기술이 적용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불교가 전파되는 각국의 건축기술에 의지하여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그대로 탑파건축에 적용하였다.

이로써 인도의 탑이 覆鉢形임에 비해 북방불교 계통에서는 한결같이 층수를 지닌 중층의 탑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결과 신라의 전형탑의 경우는 이중기단 위에 중층의 층탑으로 전개되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매우 독특한 건축양식과 조화미를 창안해 내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이것은 신라인의 예술적 천재성과 심미안의 접합에서 이룩된 일대 개가라 할 것이다. 이 조화미의 절정은 신라 8세기의 불국사 다보(多寶)․석가(釋迦) 양 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석가탑은 앞서 말한 전형 양식을 대표하는 석탑임에 비하여 다보탑은 소위 이형(異形)양식을 대변하는 절묘한 석탑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탑은 우리의 산하 도처에서 생산되는 화강석을 주재로하여 수많은 석탑을 만들기에 족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의 탑파미술은 10세기에 들어와서 태조 왕건의 불교진흥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불교사원의 건립과 함께 불사가 도모되었으나 그 조형미에 있어서 다시금 신라시대와 같은 불교예술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기단부에 비하여 더욱 둔중해진 탑신부는 상하에서 조화를 찾지 못하였고 예술적인 면에서 더욱 낙후되었다. 이는 신라말 9세기경에 일기 시작한 선종(禪宗)의 발달로 조사(祖師) 숭배의 풍조가 유행되자 그 문도들에 의해 건립되는 부도나 석비의 제작에 그 찬란했던 예술적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따라서 고려에 있어서는 석탑미술보다는 석조부도의 조성으로서 한국 석조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각부에 나타난 조각수법은 장식적 문양으로 더욱 화려해지고 복잡해지면서도 앞 시대와 같은 생명력 있는 예술적 기량은 영영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후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예술적 감각을 잃고 말았다. 이는 유교사회에 처한 불교예술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하겠지만 장인을 천시하던 조선시대의 사회풍조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석탑은 초기의 몇몇 석탑을 제외하고는 더욱 치졸한 느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조선의 국운과 함께 불교정책에 가해진 외적 요소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III. 한국의 탑의 형식



한국 석탑의 형식은 정방형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여 기단과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서 형성되나 기단은 이중 기단이 보편적이다. 이들 상하 기단과 탑신부에는 모두 목조탑의 결구 방식인 기둥을 모각(模刻)하였는데 이것이 각면의 모서리에 있다 하여 우주(隅柱)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단부에는 우주와 우주사이에 다시 수 개의 버팀기둥 즉 탱주(撐柱)를 모각하여 목조탑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대체로 탱주의 수는 시대가 내려오면서 줄어든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옥개석의 층급받침 역시 초기의 5단 받침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줄어든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옥개석 네 모서리[전각(轉角)]가 보다 경쾌하게 들려 반전(反轉)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초기의 경직되고 단조롭던 형식에 비추어 시대가 지나면서 더욱 반전이 심해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또 석탑 내부에는 사리를 봉안하게 되는데 그 소장처는 대체로 탑신 내부 사리공(舍利孔)이고 드물게는 기단 또는 지하에 봉안되는 수도 있다.

상륜부의 노반(露盤) 상부는 인도탑 형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즉 최상층 옥개 상부에는 인도탑의 기단 형식에 해당되는 노반을 설치하고 그 상부에 복발(覆鉢)을 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탑의 탑신 형식이다. 다시 그 상부에는 앙화(仰花)라든지 보륜(寶輪)과 같은 장엄구가 설치되지만 이들은 인도탑의 형식이 우리나라의 탑에 있어서는 그 상부 상륜부로서 대치되고 있다.

IV. 탑의 종류

가. 주재료별 구분

우리나라의 탑을 재료면에서 본다면 흙․나무․쇠․돌․벽돌의 다섯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반도 내에서 흑으로 만든 토탑이나 금속제의 소위 금탑이라 할만한 것은 주로 사리장엄을 위한 공예적인 소탑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국 탑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면 명실공히 한국의 탑은 목탑․석탑․벽돌탑 3종류에 국한시킬 수 있다.

목탑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 55호)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에 전해지자 가람을 장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새로운 건축이 가미되었다고 짐작되는 바 이것이 바로 탑전(塔殿)의 형식이다. 이는 중국 고유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서 사리신앙을 위한 불전이면서 동시에 높은 누각형식의 목조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짐작된다.

목탑의 형식은 전형적인 건축구조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단층기단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각 층의 옥개는 기와를 덮고 기둥사이에는 창방을 일종의 문호(門戶)로서 내어 내부에 출입을 가능케 함으로써 내부공간을 활용하는 건조물의 기능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상부에는 금속제의 상륜을 설치하여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냄으로써 석탑의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기단․탑신․상륜부를 형성하였다.

전탑은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탑의 건립에 앞서 벽돌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공정이 복잡하고 작업과정이 어려워 전국적으로 파급되지 못한 것 같다. 전탑의 형식은 목탑․석탑과 동일하지만 다만 옥개의 상하에 층급을 나타내고 있음이 일반 목탑이나 석탑의 형식과는 다른 점이다. 특이한 것은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 제56호), 안동신세동 7층전탑(국보 제16호), 안동조탑동 5층전탑(보물 제57호), 그리고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 제189) 등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다수의 전탑이 전해지고 있으며 기록상의 전탑까지 합하면 10여 개에 달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게다가 인접한 지역에서 모전석탑이 다수 건립되어 더욱 특이하다.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우리나라 탑의 전형이다. 현존하는 탑의 대부분이 석탑인데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활발한 건립이 있었으며 예술적으로도 가장 뛰어났다.

나. 지역별 구분

호 남 지 방

영 남 지 방

i) 백제탑의 영향으로 목조탑의 영향이 많다.

ii) 옥개석의 추녀마루[隅棟]는 기와를 얹은 것처럼 두툼하게 나타난다.

iii) 일반적으로 기단부의 최대폭에 비해 1층 옥개부의 폭이 더 넓다.

iv) 옥개받침의 수가 작고 옥개부가 전체적으로 아주 얇다.

i)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전탑이나 모전탑이 많다.

ii) 처마선은 거의 직선을 이루다가 추녀마루에 이르러 약간 반전한다.

iii)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단계적으로 감축하여 안정감을 준다.

iv) 일반적으로 옥개받침을 5단이고 옥개부가 전체적으로 두꺼운 편이다.

다. 시대별 구분

1. 삼국시대

◆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 石塔) :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탑이지만 근세에 이르러 그 상층이 붕괴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만 서탑의 6층까지의 동면(東面)만을 남기고 있어 그 모습을 추정할 뿐이다. 이 탑은 가장 충실하게 목탑을 모방하여 목재대신에 각 부재를 화강암 석재로서 사용하고 있다. 단층의 낮은 기단을 갖고 있으며 제1층은 3칸4면을 모하여 중앙 칸을 통하여 내부에서 十字로 교차되고 있다. 넓은 옥개와 그리고 그 밑에 층급형(層級形) 받침도 모두 목탑의 그것을 모방하였거나 변형하고 있다. 이 탑에서는 예술적인 창안이나 변형을 찾기보다는 목탑을 충실하게 돌로서 번안하려는 의사만이 일관하고 있다.

◆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夫餘 定林寺址 5層石塔) : 이 탑은 오늘날 그 상륜부(相輪部)를 잃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미륵사지탑과 같이 단층의 기단 위에 8매(枚) 구성인 제1탑신을 가지고 있으며, 넓고 얇은 옥개석과 그 밑의 2단(段) 받침으로서 구성되었는데 이는 모두 목탑양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지탑에 비교할 때 목탑의 충실한 번안이라기보다는 이 탑에는 예술적인 변형이 곳곳에 가해져서 작품 그 자체로서 가치를 한층 더하고 있다. 각 층의 감축비율이나 석재 짜임의 규칙성 등은 이 작품에서 지적할 수 있는 높은 예술성이라고 할 수 있다.

◆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 : 이 탑은 삼국사기에 분황사가 선덕여왕 3년(622)에 낙성기록에 따라 이 석탑의 연대를 추정할 수가 있다. 탑의 기단(基壇)은 잡석으로 쌓은 넓은 단층기단인데 탑신을 받기 위하여 1매(枚)의 화강암 부재를 그 중앙에 두었다. 감실(龕室)은 1층 4면에 마련되었으나 미륵사 석탑과는 달리 서로 교우(交又)되지 않았다. 현재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발굴된 석재로 미루어 5층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백제의 탑이 목조탑의 영향이 강한데 반하여 오히려 전탑의 영향이 강하여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것이다..

2. 통일신라시대

◆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感恩寺址 東西3層石塔) : 이 탑에서는 삼국의 시원석탑에서 볼 수 없었던 정비된 2층기단을 지니고 있다. 1탑신은 4우주(隅柱)와 4매의 벽판석으로 조립되었으며 그 옥개석은 8매의 낙수면 돌과 다시 4매의 받침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층의 받침은 모두 5단이다. 이 같은 탑신과 옥개의 석재조립은 상층도 같은데 기단의 광활함에 대하여 탑신 또한 거대하여서 그 탑신이 주체적인 비중을 지니고 있다.

이 감은사탑은 통일 직후에 조성됨으로써 통일의 기념탑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이에 따라 탑이 지니는 양식은 삼국에서 각기 시원된 석탑양식이 종합됨으로써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낳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불국사 석가탑(佛國寺 釋迦塔) : 석가탑은 신라 전형석탑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석탑이다. 이 탑의 형태는 2중 기단 위에 건립된 3층의 석탑이다. 상하, 좌우의 비례가 뛰어나서 다른 석탑의 모범이 되고 있으며 기단을 위시한 탑신, 옥개석 모두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듬직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각 부분에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탑 주변에는 장방석을 돌려서 탑구(塔區)를 형성하고 또 그 사이에 연꽃을 배치하였는데 그것을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고 한다.

석가탑은 1966년에 해체 수리 복원되었는데 2층 탑신의 상면 중앙부에 사방 50cm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동제사리외함(金銅製舍利外函)을 비롯하여 은제사리함(銀製舍利盒) 등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고 그리고 사리병에는 사리 1과(顆)가 있었고 또 곡옥(曲玉), 환옥(丸玉), 수정, 유리 등의 장엄을 위시하여 청동제 비천(靑銅製 飛天), 구리, 거울, 향목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유물 이외에 사리함 위에 얹혀 있던 두루마기 경전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장경으로 판명됨으로써, 세계 인쇄 기술사상 다시 한 번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 경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서 신라시대 조탑(造塔)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이 경전은 글자의 도법(刀法)으로 보아서 목판경전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 탑이 건립될 당시 신라에는 목조 인쇄술이 상당히 보급돼 있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인쇄술의 경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불국사 다보탑(佛國寺 多寶塔) : 이 탑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완전히 규범에서 벗어난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이루어졌다. 각부의 조각수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의 구조물을 보는 듯 아름다우며 복잡한 상하의 가구(架構)가 중심에 통일되어 하나도 산란함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인상적인 균정미(均整美)를 보이고 있다.

다보탑에서 볼 수 있는 특수 양식을 종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평면경영에서 전형양식의 기본인 방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바, 탑신부와 옥개석 등 각부를 8각 부재로 복잡하게 가구(架構)하였으나 상하부분이 서로 균형된 비율과 정형미를 보이고 있다.

둘째로 기단부 사방에 보계(寶階)를 가설하였다.

셋째로 상층 기단에 방주를 세우고 목조건축의 두공을 연상시키는 받침부를 시설하였다.

넷째로 갑석의 신부(身部)에 가구한 상하부의 난간과 죽절형(竹節形) 석주 및 앙련대석(仰蓮臺石) 등은 마치 목조 구조를 방불케 하고 있다.

다섯째로 전 부재의 치석과 결구수법의 문제인데, 화강암을 이렇게 목재 다루듯이 석재로서 수려하게 각 부재를 조성하여 촉감마저 온유한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

◆ 화엄사 4사자 3층석탑(華嚴寺 4獅子 3層石塔) : 이 석탑은 상층기단에 돌사자 4마리를 배치하였는데 신라시대의 사자탑으로는 유일하며 그 작품이 뛰어나서 다보탑과 함께 한국 이형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 석탑의 특수양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상층기단의 구조에 있어서 판석으로 이루어진 면석을 조립한 것과는 달리 4마리의 사자를 배치함으로써 각 면의 양 우주와 탱주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사자상을 일반형 석탑에 사용한 예는 이 석탑이 최초이며 이후 이러한 용례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여러 기가 있다.

사자는 특히 불교적인 조형미술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사자가 불교에서 연꽃과 함께 상징적인 존재로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관념에서 여래의 위치에 비유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하층 기단 면석의 각 면에 여러 종류의 천인상을 각양각태로 조각하고 초층 탑신에도 각 면에 문비를 모각한 좌우에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양각하여 장엄을 다하였다. 이러한 여러 조각은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정형에서는 볼 수 없는 이후 전형에서 장식적으로 변한 특수형 석탑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 실상사 동서 3층석탑(實相寺 東西3層石塔) : 기단 주위에는 넓게 장대석(長大石)을 둘러서 탑의 구획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불국사 석가탑에서의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와 같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 탑구 내부의 중앙에는 지대석을 마련하여 석탑의 하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하층기단은 하대석(下臺石)과 중대석을 붙여서 4매의 긴 돌로서 조성했다. 갑석은 상하 모두 경사가 급한 편이고 우주와 탱주 역시 우주 둘에 탱주 하나씩 상하 동일한 숫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다른 돌로 독립시켰고 옥개석의 받침은 4단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에 가까우나 낙수면의 전각(轉角)은 위로 솟아오르는 반전을 경쾌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의 석탑의 상륜부가 대부분 유실된 데 비해 이 탑은 거의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 방면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고려시대

◆ 월정사 8각9층석탑(月精寺 8角9層石塔) : 이 탑은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부를 건조한 형식으로 8각형의 평면을 이룬 점이 특이하게 보이는데 이 석탑의 특징을 부재별로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전체적으로 보아 서탑의 평면이 8각형을 이루고 있어서 선대의 方形平面에서 벗어나고 있다.

둘째로 층수(層數)가 많은 것도 주목된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정혜사지 13층석탑과 같이 다층탑이 적지는 않으나 이것은 방형탑인데 반해 8각형인 월정사지 탑은 다층에 다각인 것이 특이하다.

셋째로, 기단부에 있어서 하층기단에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연화대(蓮花臺)를 마련하여 장식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그리고 상층기단괴임대와 탑신괴임석이 끼워져 있는 것도 특이하다.

넷째로 각 층의 체감률이 적으나 기단부가 안정된 편이어서 오히려 경쾌한 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상륜부재의 장식은 석탑 전체를 장식적인 형태로 보이도록 하고 있다.

◆ 보현사 8각 13층석탑(普賢寺 8角 13層石塔) : 이 탑은 3단의 높직한 기대석을 중첩하고 그 위에 단층기단을 설치하여 13층의 탑신을 구성하였으며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석탑으로서는 가장 층수가 많으면서도 완형으로 보존되고 있는 석탑이다. 이 탑의 특징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기단부에 3단의 기대석 측면에 수미단(須彌壇)과 같은 문양을 조식(彫飾)하여 기저부터 장식적인 의장을 볼 수 있다. 기단은 역시 상하대에 앙복연(仰伏蓮)을 조각하여 마치 불상 좌대(座臺)와 같은 형식을 이루고 있다.

둘째로 탑신부에 있어서는 초층부터 身․蓋石의 체감이 아주 작은 편이어서 세장(細長)한 탑신을 이루고 있으나 개석이 광대하지 않으므로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전각(轉角)의 반전과 잘 조화되어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셋째로 정상(頂上)에는 청동제의 연화좌(蓮華坐)위에 상륜부를 올리고 있으니 이것도 이 석탑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 경천사지 10층석탑(敬天寺址 10層石塔) : 초층 탑신부에 새겨져 있는 ‘지정8년무자(至正8年戊子)’라는 명문(銘文)에 의하여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 즉 이 석탑은 당시의 추세로 말미암아 원나라의 라마교(喇嚰敎)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하겠으나 당시 고려의 불교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재료 및 건조양식과 각부의 기교에서 독창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이 석탑의 원위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경천사지였으나 일제 침략기에 일본인들이 자기네 나라로 불법반출했다가 그 후 한국으로 다시 반환되어 현재는 서울 경복궁 내에 세워져있는데 이로 인해 지대석은 결손 되고 없다.

이 탑의 구조는 기단부는 2층으로 이루어졌고 그 평면은 4면 두출성형(斗出星形)의 아자(亞子)형을 취하고 있다. 각 층의 면석에는 각기 불․보살, 인물, 초화(草花), 반룡(蟠龍) 등을 양각하였으며 각 모서리에는 절목원주형(節目圓柱形)을 모각하였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초층과 2,3층은 기단과 같이 4면 두출성형의 아자형 평면을 이루었고, 그 위의 4층부터는 방형이다.

각 층의 탑신 위에는 옥개석을 놓았는데 탑신석의 각 모서리에는 원주형을 모각하고 각 층, 각 면에는 십이회상(十二會相)을 조각하여 불·보상, 천부(天部), 기타 여러 가지 상을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단조로운 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원형의 평면으로 노반(露盤)과 연구문형(連球紋形)의 복발(覆鉢)과 앙련(仰蓮)으로 된 앙화(仰花)가 있고 그 위에 보탑형(寶塔形)과 보주가 있다. 그런데 이들 상륜의 각 부재는 우리 나의 탑의 상륜형식과는 달리 오히려 라마의 수법을 엿볼 수 있다.

이 석탑은 목조건축물의 각부를 모각하고 또 각부에 불·보살상을 빈틈없이 배치하여 그야말로 건축과 조각의 양면을 다 같이 구비하고 있는 특이한 석탑이라 하겠다.

V. 탑 속의 사리장치(舍利藏置)

탑파의 건립이 사리봉안에서 출발하였던 고로 眞身舍利이건 法身舍利이건 탑내에는 사리를 봉안함이 원칙이다. 인도의 카니시카왕(재위140-170)元年銘이 있는 사리기는 유명하거니와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탑파에서 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탑 속의 사리장치는 다른 불교국에 비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우수하다. 이를 시대별과 탑종별(塔種別)로 그 내용과 변천을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자.

가. 삼국시대

前秦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順道를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에 고구려로 보내어 불상고 불경을 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의 불교전래이다. 삼국중에서 지역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게 접하여 있던 고구려에는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탑은 없다. 다만 평양 청암리사지에서 8각목탑지가 추정될 뿐이다. 고구려의 탑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거의가 목조탑이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백제는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지 12년 뒤인 침류왕(재위 384-385)원년에 동진으로 부터 들어왔고, 성왕(재위 523-554) 30년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다.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궁궐을 짓는 등, 건축기술이 매우 발달하였던 백제는 7세기초에 불교전래 뒤 200년 동안 목탑 건립으로 익힌 기술과 경험을 살려 우리나라 최초의 돌[石]로써 탑을 세워 <한국석탑이 발생국>으로서의 榮譽를 지니게 되었다. 또 백제의 名工 아비지가 신라의 초청으로 왕도 경주에 가서 「皇龍寺木造9層塔」을 건립한 것은 ��三國遺事��에 보이는 사실이다.

이토록 불교문화가 찬란하였던 백제를 가리켜 중국으 기록에서 <寺塔甚多>의 나라라 하였다. 그러나 이렇던 백제도 오늘 지상에 남겨 놓은 탑은 오직 익산 「미륵자사지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5층석탑」등 2기뿐이고, 절터의 木塔址에 사리장치 상황을 짐작할 따름이다. 부여근처의 목탑지에서 심초석이 조사된 것은 군수리목탑지(軍守里木塔址)와 구아리목탑지(舊衙里木塔址)의 두군데이다. 심초석이란 중심기둥[察柱]을 받치는 초석이지만 구멍을 파고 사리를 장치해 두는 곳도 되는 것이다. 군수리목탑지에서는 일제 때 지하 약 1.6m에서 방형석이 발견되었으나 사리공은 마련되지 않고 석조여래좌상 1구, 금동미륵보살입상 1구, 金環 1, 玉類등이 발견되었다. 구아리 심초석은 2단으로 된 방공으로 한 변이 17.5cm, 깊이가 3cm와 한 변이 12cm, 깊이가 10cm의 구명인데 상단은 4각형 석개로 덮여 있었다. 사리공의 형도 방형과 원형의 두가지가 있는데, 오래된 탑에서는 각형이 더 많다. 백제의 방식은 신라와 일본에 전해져 일본 비조시대(飛鳥時代)의 목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근년의 일본 별륭사목탑의 사리공 조사에서는 이사실이 증명되었다.

이와 같이 목탑의 심초석에 사리를 장치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을 생각할 수 있겠다. 전북 지방에서도 최근의 조사 연구로 익산의 제석사지의 심초석(가로 25.5cm, 세로 61cm, 깊이 18cm)이 알려 졌다.

나. 신라시대

신라시대는 우리나라 탑 속의 사리장치에서 질적으로 으뜸이 되는 시대라 할 수 있겠다. 문헌에서 불사리(佛舍利) 전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찾는다면 삼국중 불교전래가 제일 늦은 신라에서 찾아 볼수 있다.

��三國史記�� 권4 「眞興王10年條」에는 중국 양나라에서 불사리를 전하니 진흥왕(재위 540-576)이 봉영(奉迎)하였다고 하는 짤막한 기록이 보인다

‘十年春梁遣使與入學僧覺德送佛舍利 王使百官奉迎興輪寺前路’

또 ��三國遺事�� 권3 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는 거의가 사리에 관한 기록인데 앞의 ��三國史記��에서 같이 진흥왕대에 양에서 사리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선덕여왕(재위 632-647) 12년(당 내종 정관17년)계묘년에 자앙법사가 佛頭骨 · 佛牙 · 佛舍利 100립과 불타가 입으셨던 <비라금점가사>한 벌을 가져왔고, 이때 가져온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목탑에, 하나는 태화사탑에, 나머지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긍강계단에 두었으며, 나머지 것들은 소재가 불명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문헌상 뚜렸하고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발견된 유물들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황룡사목탑이다. 진흥왕 14년(553) 계유년에 始建이 되어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16년에 몽고란에 불타 없어진 이탑은 신라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호국 · 호법에 큰 구실을 하였었다. 천 몇백년 동안 탑지에 묻혔던 舍利寶는 한때 무법자들에 의해 도굴되었었으나, 지금은 회수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때 발견된 「金銅塔誌」에는 900여 자의 쌍구체로 음각된 명문이 있어 경문왕(재위 861-875) 11년 重修때 사리장치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즉, 그내용을 모면 ��무구정광경��에 따라 소석탑 99기 각 기마다에 ��다라니4종경��을 넣어 철반(鐵盤 : 상륜부)위에 안치하고 다음해인 경문왕 12년에 공을 끝내었다. 주본사리는 심초석 가운데에 金銀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병이 안치도어 있었으나, 연월과 사유기는 없었다. 이 탑지의 판독으로 경문왕대의 사리장치 사정을 알 수 있을 뿐만아니라 사료로서도 매우 귀중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은 불국사 「석가탑」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문화사적 가치를 들어야 되겠다. 이탑은 1966년, 도굴배들에 의해 손상을 입어 해체 수리할 때 2층 방형 사리공안에서 ��무구정광경��이라는 다른 사리구와 함께 나왔다. 이 경속에는 당의 <則天武后字>가 4자나 있는데, <측천무후자>는 대체로 690년 - 704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석가탑」 건립 연대인 751년을 하한으로 한다면, 이 경이 이루어진 것은 그보다 앞서는 시기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인쇄된 경문으로서는 지금까지 最古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리니경��(770년)보다 20년이 앞서는 실로 세계 최고의 목판인경이라 하겠다. 「석가탑에서는 이 經 외에도 동경 2, 사리함, 유리제 사리병, 은제 사리외호와 내호, 목제 사리병, 은제 사리호, 목제소탑 13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중 유리제 사리병은 당의 양식을 따른 유일한 병이었는데 취급자의 부주의로 인해서 천년여 동안 보존되어 오다가 우리 세대에서 파손되었다.

♠ 신라시대에 ��무구정광경��에 의한 공양소탑(供養小塔)이 탑내에서 발견된 예

황복사 3층석탑(경주 구황리3층석탑. 성덕왕 5년. 706년)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경문왕대)

경주 창림사지석탑(문성왕 7년. 845년)

경주 황룡사목조9층탑(경문왕 11년. 871년)

합천 해인사일주문전길상탑(진성왕 9년. 895년)

♠ ��무구정광경��이 들어오기전과 그 뒤의 탑으로 이 경을 따랐다는 明記가 없고 사리장치가 발견된 탑들의 예

경주 분황사석탑(선덕여왕 3년. 634년)

월성 감은사지 서3층석탑

중원 탑평리 7층석탑

금릉 갈항사동서3층석탑(경덕왕 17년 758년)

傳 흥법사염거화상탑(문성왕 6년. 844년)

다. 고려시대

고려는 無血로 신라의 천년사직을 이어 받아 불교를 국교로 삼고 태조왕건의 <訓要十條> 발표등으로 각 지방마다 다트어 사원이 경영되어 탑파 · 불구 외에도 많은 불교미술품이 조성되었다. 건국초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였는데 새로운 활동무대에서 새로운 활력소를 얻어 신라말기 優美한 것에만 치우쳤던 기풍에서 벗어나 웅대한 기상으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13세기에 몽고의 침입으로 그들의 지배하에서 말기까지는 이질적인 그들 문화의 영향도 있어 高麗的인 미술활동은 침체될수 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의 사리장치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시대는 대체로 사리장치의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신라의 그것만 못하다. 그서은 施納이 국가적 차원서 이루어지느냐, 개인적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데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둘째, 탑내에서 供養小塔이, 비록 소수씩이지만 발견되는 일이 충남지역의 여러곳에서 이는 사실이고려시대의 사리장치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양소탑도 중부지역의 금강산을 한계선으로 하여 그 북부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셋째, 사리구를 탑내에 장치하는 곳도 신라대에서는 한 군데로, 그것도 대체로 제1탑신이 가장 많은데 고려시대에는 신라방식을 따르면서도 두군데, 심지어는 세군데에도 장치하는 예가 보인다. 넷째로 사리구에는 元의 영향을 받은 라마탑 형식의 사리기가 보이며 우리제 사리병도 거의 자취를 감추고 수정제 병등이 나타나는 점등을 들 수 있겠다.

라. 조선시대

신라 · 고려를 통하여 깊이 신봉되던 불교를 조선에 들어서는 배척하고 유교로서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으니 불교미술은 쇠퇴될 수 밖에 없었다. 건국초기에는 태조, 세조(재위 1455-1468)같은 불교를 아끼는 국왕이 있어 얼마간의 造塔事業이 있었으나, 후에는 사찰건물을 수리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함께 수리하게 도고 이러한 기회에 사리구가 追納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사리장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前述한바와 같이 탑을 수리할 때에 그사실을 기존의 탑지에 추가하여 기록하는 일이 있고, 둘째, 왕실과의 인연도 전연 끊긴 것이 아니었음과, 셋째, 궁녀들이 개인적인 축원문을 한글로 비단에 묵서하여 사리합 등을 몇 겹으로 싸서 納置하는 일들이 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VI. 맺음말

지금까지 탑에 대한 개념과 기원을 비롯하여 삼국,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는 탑의 양식을 살펴보았다. 한국의 석탑은 삼국 말기인 600년경에 백제와 신라에서 발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국 석탑의 전형양식을 얻게 되었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많은 우수한 석탑들이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전통은 고려에 계승되어 조선 왕조 초기까지 미쳤다. 한국의 석탑은 전형양식이라 일컫는 일반형과 특수양식이라 일컫는 이형양식을 들 수 있는데 각각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민족의 문화적 창의성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塔婆는 사리봉안을 근본 목적으로 하는 축조물이다. 탑 속에는 신앙의 소산인 舍利寶가 장치되는 것이므로 와관상의 미적인 삼상과 아울러 내적인 면도 고찰되어야 할것이다.

우리나라의 사리구는 형태구성에서 창의성이 발휘되고 높은 시술로 제작되어 일찍이 外來人들의 奪取의 좋은 대상이 되어 왔다. 일본인들은 무지몽해한 시골사람들을 사주하여 탑에 대한 불법행위를 저지르게 하고 배후에서 유물을 입수하는 등의 교묘한 수법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귀중한 사리보가 불법으로 처리되거나 해외로 유출되는 등의 역사적 비운을 겪게되었던 것이다.

과거의 사리장치 발견은 도굴범의 불법행위로 나온 것이 많기 때문에 학술연구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 온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의 사정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유품의 일부가 우리에게는 상당량 남아았음을 조금은 다행이라 할 수 있겠고 외국에 나가있는 우리 문화재의 반환이 빠른 시일내에 이루어 졌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

▶▶ 참고문헌

송석상, 이강승 1996 <<그림으로 배우는 우리의 문화유산>> 학연문화사

장충식 1987 <<新羅 石塔 硏究>> 일지사

1989 <<韓國의 塔>> 일지사

정영호 1989 <<빛깔있는 책들>>47 <석탑> 대원사

1992 <<韓國 佛塔 100選>> <韓國 中 · 近世 佛塔의 硏究> 韓國精神文化硏 究院

황수영 1992 <<韓國 佛塔 100選>> <韓國 古代 佛塔의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편집부 1996 <<추계 정기고적답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 학과


의협 정치력 강화 기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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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불인: 의협 광고 심의료 전용 확인_정치력 또 한번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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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정치력 강화 기회 있었다

2006년 7월 의협 장동익 회장을 비롯해 전국 시도의사회장이 복지부에 모였다.

유시민 장관이 포지티브리스트를 추진하면서 의료계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의료계 지도부와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하 지만 이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든 전국의 시도의사회장들은 임전무퇴의 결의가 의연했다. 유시민 장관은 직전 선거에서 의료 5적으로 꼽혔던 바로 그 인물이다. 게다가 정치인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인물로 의료계의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모인 지역 회장들은 나름대로 어떤 주장으로 유 장관의 주장을 꺾을 것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전략회의까지 진행됐다.

유 장관의 당부는 간략했다. 포지티브리스트 도입에 의료계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약값 절감분은 최대한 의료 수가로 반영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의료계는 이에 대해 정치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문서로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유 장관은 만약에 그런 것이 만들어진다면 장관과 의료계가 이면 계약을 통해 제도를 도입했다고 공격받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유 장관은 이어 의사단체, 약사단체, 제약협회, 간호협회 등 보건으료 관련 제 단체들이 모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반목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정부의 입장에서는 어떤 정책도 추진하기 힘들다며 의료계가 먼저 통 크게 협조해 준다면 앞으로 정부 입장에서도 충분히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더불어 추가 재정의 필요 없이 제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모든 내용에 대해서는 협조하겠다며 당시 의사회장들이 요구한 '회원 징계권' 등에 대해 얼마든지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일전을 각오하고 들어간 회장들은 모두들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분위기였다.

엄격히 말하자면 포지티브리스트는 의료계의 이익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제도다. 그런데 이를 동의해 주는 조건으로 돌아오는 열매들이 모두 입에 단 것들이었다.

의료계의 많은 '옛날 이야기' 가운데는 김재정 의협 회장이 의약분업 투쟁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이야기가 있다.

당 시 의료계는 죽음을 불사한 항쟁으로 의약분업을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고 이미 수차례 파업을 통해 강력한 힘을 과시한 상태였다. 하지만 김 회장이 대통령을 만나 넙죽 업드리는 바람에 결국 의약분업은 그렇게 통과되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김 회장이 대통령 앞에서 조금만 더 당당하게 했어도, 그후 파업을 한두 번만 더 했어도 의약분업을 막았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이 날 유 장관을 만나러 온 회장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마음 속에 새기면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나는 돌아가면 회원들에게 나는 이렇게 당당하게 싸웠노라고 마치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스토리를 그려 온 것이다. 하지만 유 장관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판단이 흔들렸다.

각 시도로 돌아간 회장들은 모두 마음 속에 큰 짐 하나가 생겼다. 회원들에게 마땅히 설명하기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사실은 복지부가 오랫동안 의료계 숙원이던 많은 제도 개선들을 약속했지만 이것들은 모두 오히려 마음 속의 짐을 키우는 요인이 될 뿐이었다. 결국 당시 의사신문도 이 내용을 이렇게 조그맣게 다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다행한 일이 생겼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동익 회장의 거짓말이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후로 장 회장은 계속해서 감사를 받아야 했고 이 와중에서 이날 있었던 암묵적 약속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포지티브리스트 제도는 의료계에서 동의를 해주지 않아도 도입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료계는 복지부로부터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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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광고 심의료 전용 확인_정치력 또 한번 흔들


복지부, 의협 광고 심의료 전용 4700만원 토해내라



의협이 광고 심의료를 전용했다는 의혹이 확인됐다.

복지부는 최근 의협이 광고 심의료를 광고 심의와 관련 없는 용도에 사용했다며 이 가운데 부적정 집행이 확인되는 4700만원을 회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실제 복지부에 감사결과에 의하면 의협은 지난 2007년 11월 의료광고 심의료 중 2731만원을 털어 협회업무용 차량을 구입, 운영해 온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의협은 같은 해 7월 의료광고심의수수료 중 441만여원을 임원실에서 사용할 책상 등 13종의 집기를 구입하는데 사용하는가 하면, 회장 및 총무이사 명의로 각종 부의금이나 축하화환을 보내는데 쓰기도 했다.



아울러 2008년 6월에는 카메라 2대와 빔프로젝터 2대 등 4개의 비품을 1550여만원에 구입한 뒤 빔프로젝트 1대만을 심의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협회 업무용으로 써온 것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의협이 회의비용으로 청구한 금액들도 상당부분 부적절하게 사용된 것으로 지적됐다.



골프장 및 인근식당에서 간담회 명목으로 비용을 지출하거나 첨부한 영수증과 실지급내역이 상이한 것으로 드러나는 등 직무관련성이 떨어지는 경비집행이 이루어졌다는 것.



또 회의비용 중 식사비로 청구된 금액 중 일부는 첨부한 영수증과 실지급내역이 상이하거나 유흥주점에서 쓴 것으로 확인돼 부적정 집행내역으로 분류됐다.




의협의 광고 심의료 전용에 대한 지난해 9월 열린 국정감사에서 전현희 의원에 의해 지적됐다. 하지만 당시 주수호 회장은 근거 없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와 관련 당시 의료계는 전현희 의원이 의협 법제이사를 맡았던 전력을 들먹이며 배신을 당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또 주수호 회장의 강력한 반발과 사과의 뜻을 밝히지 않은 데 대해서는 국회 보건복지위 전체적으로 무례하다는 평을 받으며 공적이 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의협의 대국회 활동이 위축되기도 했다는 평이다.

하지만 결국 전현희 의원의 지적이 대체로 맞는 것으로 드러나 의협의 대 국회 활동 범위는 또 위축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의협의 정치적 무능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돼 왔다.

지난 김재정 회장 당시, 의협은 스스로 정치 세력화를 외치며 '잘못된 법부터 고쳐나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후 수년이 지났지만 어느 법의 어떤 조항을 어떻게 고치겠다고 내놓은 것이 없다.

악재는 장동익 회장 당시에 터졌다. 장동익 회장은 자신의 '정치권에 돈 줬다'는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결국 국회 증인석에 서야 했고 회장 자리에서도 쓸쓸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주수호 회장은 이런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도록 한 막후로 알려졌지만 결국 선거를 통해 회장직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또 의협의 정치세력화로부터는 멀어지고 있다.

한때는 의협 회장이냐, 복지부 장관이냐 하던 때가 있었다. 의료계에서 원로급이라고 할만 한 사람들은 '의협 회장이면 복지부 장관과 같은 급'이라는 말을 추억처럼 하곤 한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의협회장 출신 복지부 장관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 출신 복지부장관은 김대중 정부 초기 주양자 장관이 투기 의혹으로 조기 퇴진한 이후 더이상 배출되지 않고 있다.

의협 정치세력화 실패는 '회장 흔들기' 때문

전문가 집단인 의협은 어쩔 수없이 정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과학을 한 사람들이라 주고 받는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회원들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는 누가 해도 정치력을 가진 협회로 이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의약분업 이후 의사들은 대부분 의협 집행부가 복지부의 정책에 대해 찬성하거나 동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면 무조건 강력히 반발했다. 뿐만 아니라 의료계 내에서 합의가 됐던 것도 법안 논의과정에서 따로 반대의견이 전달되는 사례도 있었다. 결국 복지부도, 국회도 더이상 의사협회를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의협은 그동안 정치세력화를 지향하면서 항상 이면 합의 또는 이면 지원 등 이면 활동을 강조해온 측면이 있다. 물론 정치에는 앞에서 이뤄지는 일보다 뒤에서 이뤄지는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는 언제나 명분 싸움이다. 스스로 명분에서 밀리면 아무리 이면 합의가 있어도 결국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협이 스스로 정치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단 선출된 회장에 대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협회를 이끌 수 있도록 뒤에서 돌을 던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의협 회장은 의료계 내부의 이권이 다양한 만큼 목소리 큰 사람들의 주장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각종 토론회 등을 통해 총의를 모아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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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일대 당일 관광 코스

저는 여행을 가면서도 웬만하면 일정이나 코스를 미리 잡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코스나 일정을 미리 정해 놓으면 정해진 시간 내에 볼만한 곳을 알차게 구경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코스에 얽메이다 보면 여행 과정 그 자체보다는 코스에 집착하게 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그 과정 모두가 구경이고 여행인데도 불구하고 코스가 정해지면 그 과정은 오직 다음 코스로 가여 할 먼 길에 불과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거기에 일정까지 빡빡하게 정해 놓으면, 길이라도 조금 막히는 날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군 단위로 어느 어느 군을 구경해야겠다는 정도만 잡고 지도 한권 들고 떠납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 다니다가 관광 안내 표지판 등을 보고 눈에 띄는 곳이 있으면 찾아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오랜만에 하루 일정으로 경북 남부지방 일대를 돌아보는 코스를 한 번 짜봤습니다. 이마저도 상당히 느슨해서 여행 과정에서 조절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만 코스나 일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고 사전정보라고 보는 정도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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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위-칠곡-성주-김천

의성 가볼만 한 곳

탑리 5층 전탑




군위 가볼만 한 곳


▷군위삼존석굴(제2석굴암)

동산계곡을 지나 10분정도 내려오면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군위삼존석굴이 있다. 깎아지른 듯 한 절벽의 자연 동굴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온화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삼존석굴의 존재가 학계에 알려진 것이 1962년이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1세기 이상 일찍 만들어졌으나, 발견이 늦어 제2석굴암으로 명명되었다. 입구에 먹을거리 골목이 형성되어 있어 식사를 해결하기에 더없이 좋다.

▷돌담마을

군위 삼존석굴에서 약 10분 정도 내려가면 육지속의 제주도라 불리는 대율리 돌담마을이 있다. 마을 뒤편으로는 약 5천 평의 송림이 있으며 이곳은 예로부터 동제를 드리는 솟대가 있는 신성한 곳임과 동시에 누구나 와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자연휴양지로 활용되고 있다.

대율초등학교 건너편에는 넓고 푸른 잔디와 체육 시설 및 놀이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들의 피서나 소풍 장소로 제격이다. 마을에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로 쌓은 돌담길이 이어져 있으며, 정원이 잘 가꾸어진 상매댁(남천고택)과 대청이 자리 잡고 있어 문화 체험 장소로도 좋다.



성주 가볼만 한 곳


[10월 가볼만한 곳] 전통의 향기 그윽한 성주 한개마을


▲ 해묵은 기와집과 투박한 돌담이 잘 어울리는 한개마을의 돌담길(사진제공:여행작가 양영훈)
한개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고향길 같다. 차창 밖의 평범한 풍경이 오히려 고향처럼 소박하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또한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은 계절의 풍요로움을 말해주고, 나직한 산자락에 등을 기댄 마을마다 가을걷이하느라 몹시 분주해 보인다. 그러나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의 한개마을은 여느 마을들과는 달리, 여유 있고 고즈넉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랜 내력을 이어온 전통마을 특유의 위엄과 기품이 엿보인다.


칠곡 가볼만 한 곳

송림사 5층 전탑






김천 가볼만 한 곳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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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블로그, 트랙백 지원 않는다...

컴맹구글 블로그: 트랙백 지원 안함 <br> (Not support Trackback)

이럴 수가 ...

상식적으로도 그렇고 구글 블로그가 트랙백을 지원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해본적도 없는데...

혹시나...
하다가 이제 막 역시나 하던 차에 위 블로그를 발견하고서야 그랬구나 하면서도 아직돼 왜? 하는 궁금증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역시나
이노무 백링크라는 것이 그럼 다른 블로그에는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구글 블로그 안에서만 쓰는 기능인지, 우리나라에 구글 블로거가 몇명이나 된다고 제 글에 백링크를 걸겠습니까?

누가 설명 좀 해주세요...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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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글쓰기의 책임은 어디까지?



이 글은 학주니닷컴-블로그는 그저 블로그일 뿐이라는 글의 트랙백으로 쓴 글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것.

블로그, 웹 게시판, 아고라 등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됨에 따라 그에 대한 책임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미네르바는 결국 자신이 쓴 글로 인해 인신구속이 돼 있는 상태다. 또 많은 블로그들은 광고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대기업 제품에 대한 리뷰를 싣고 있는 블로거들도 결국 이 논쟁 속에 있음은 물론이다.

글을 쓰는 것은 자유다.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자신의 일기장에 어떤 내용을 쓰든 그것을 누가 제한할 것인가?

하지만 출판을 하는 것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유도 맞지만 책임에 더욱 방점을 찍고 싶다.

글쓰기는 자유지만 출판은 책임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기초 정보와 지식이 바탕이 돼야 하고 거기에 덧붙어 특정 글에는 아주 많은 추가 노력이 필요하다. 글이라는 것이 그냥 공짜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어떤 사람은 한 권의 책을 평생에 걸쳐 쓰기도 했다니 한 줄 한 줄의 글을 그냥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이렇듯이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글은 마땅히 그 대가가 지불돼야 한다. 그것이 그냥 단순히 독자들의 관심이건 금전적인 보상이건 저자의 입장에서는 보상이 필요하다.

글쓰기 보상 주체는 독자, 광고자 또는 글을 쓰게 하는 사람

어떤 글에 대해 보상을 하는 주체는 크게 보아 세가지다. 첫번째는 그 글을 읽는 독자가 보상을 하는 경우이고 두번째는 그 글을 쓰도록 하는 사람, 세번째는 그 글의 독자들에게 광고를 하고 싶은 사람이다.

서점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책들은 독자가 보상을 하는 경우다. 사실은 가장 바람직한 경우이기도 하다.

독자는 그 글을 적정한 비용을 들여 구입해서 보고 저자는 오직 독자의 입장에서 성실하게 읽을만한 책을 쓰면 된다. 모든 글쓰기가 여기에 해당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글을 쓰도록 하는 사람이 보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주요 정치인들을 다룬 다양한 형태의 책들은 이런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사업가들도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한다. 물론 서점에서 팔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 책은 출판을 원한 사람이 다시 사들이는 경우가 많고 그 비용은 결국 글을 쓰도록 하는 사람이 부담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쓰여진 글은 대체로 사실 여부를 떠나서 사회 전반적으로 봤을 때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이 담길 가능성이 높다.

세번째는 광고주들이 부담하는 경우다. 신문이나 잡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 글이 독자들에게 영향력있게 다가갈 경우에는 더욱 광고효과는 높아지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은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고 광고주들은 영향력 있는 매체를 찾아 광고를 하는 것이다.

이 세번째 경우는 위의 두개의 경우에 비해 조금 더 복잡한 영향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런 류의 글들은 광고 내용과 전혀 무관한 글을 싣기도 하지만 관련있는 글을 싣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이 글은 다시 두 번째와 같은 상황이 된다. 동시에 이런 글들은 독자들이 돈을 내서 사서 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외면할 수는 없고 결국 첫번째 글쓰기와 같은 효과를 갖기도 한다. 그래서 일정 규모 이상의 신문들은 받드시 유료 독자를 확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블로그는 여기서 어디에 해당할까?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글은 어떠한지?

블로그뿐만 아니라 다음 아고라 등 인터넷에 개인적으로 글을 올리는 많은 사람들은 결국 독자들이 보상입니다. 오늘 하루 몇 명의 독자가 찾아오고 그 가운데 몇 명의 독자가 댓글을 남기고 몇 것의 추천을 받았느냐가 결국 블로거에게 돌아가는 보상의 전부입니다. 대부분의 블로거들은 결국 이 보상때문에(그냥 자기만족 때문에) 많은 시간을 들여 글을 쓰는 것입니다. 구글 애드센스를 한두 개 달았다고 해서 금전적 보상이 돌아가는 것은 거의 없다면 결국 이게 전부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위의 분류에서는 글을 쓰도록 하는 사람이 보상을 하는 경우에 포함됩니다.

내용에 영향 미치지 않는 광고는 무방

하지만 파워블로그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구글 광고만으로도 상당한 액수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 구글 애드센스라는 광고가 그 구조상 블로그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내 블로그에 어떤 광고가 실릴 것인지 특정할 수 없으며 그 제품을 홍보해줬다 해서 더 많은 광고비가 들어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3번째 글쓰기 형태에서도 가장 바람직한 형태라고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글 광고를 붙이고 난 뒤에는 일정 부분 글쓰기의 방향(내용자체의 진실성이 아니라)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부 유명 블로거 가운데는 대(?)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의 책임감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여기에 기자냐 아니냐, 전문 작가냐 아니냐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수 이상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고 글을 쓰게 하는 사람의 지원을 얻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본적인 작가 윤리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지원 받아 글 쓸때는 미리 밝혀야

이 기본적인 작가 윤리의 시작은 바로 '지원받았다는 내용을 당당히 밝히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럼 오해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사실인냥 써서는 안 되겠지만 좋은 것만 사실에 바탕해 좋다고만 쓰고 나쁜 것을 알고서도 쓰지 않았다 해도 독자들은 이해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수준의 독자를 유지해야 지원자도 계속 지원해줄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작가윤리는 항상 감시받게 될 것입니다. 독자들은 자기가 후원받은 상품에도 불구하고 나쁘다는 것을 사실대로 써줬을 때 더 감동하는 법이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지원받았다는 내용을 밝히지 않고 제품 리뷰를 한다던가 평가하는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하지 않은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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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미네르바와 같은 글쓰기의 책임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네르바는 특정 기업이나 정치세력으로부터 돈을 지원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평가하기에는 특별히 사실을 왜곡하거나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글로 인해 개인적인 이익을 얻었다는 것도 밝혀진 게 없습니다.(저는 미네르바의 글을 특정해 읽어본 적은 없으며 다만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만을 기초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글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약간의 과장이 가미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처벌론자들은 그 글의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처벌 근거인 것 같습니다.

과연 이게 처벌 가능한 사안일까요?

위의 긴 논쟁에 비하면 이 사안은 너무 답이 간단 명료하지 않나요? 그런데 검찰 수사 결과는 발표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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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걱... 그런데 정작 학주니닷컴에서는 제가 차단됐다고 댓글을 달 수가 없네요... 왤까요? 아시는 분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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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리기 쉬운 국어, 동사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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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주어 이르다/이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들 영어공부에는 몰두하지만 참 국어공부는 하지 않는 편입니다. 요즘 개인마다 모두 블로그를 하나씩 운영하면서 참 많은 글을 쓰지만, 기본적인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이 허다합니다.

저도 기자라는 직업으로 많은 글을 써왔지만, 막상 쓸려고 보면 헷갈리는 단어, 표현들이 많습니다.

가능한 한 사전을 찾아보고 쓰려 하지만 언제나 시간에 쫓기다 보면 틀린 표현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는 글을 쓰다 보면 많이 틀리는 것이 활용입니다. 동사가 활용을 위해 다양한 어미와 결합하면서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활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워'와 '주어'입니다.

문) 나무를 (1. 주워 2. 주어)다가 불을 지폈다.

정답은 1번입니다.


줍다

발음〔줍ː따〕

활용〔주워, 주우니, 줍는[줌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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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
1 바닥떨어지거나 흩어져 있는 집다.

쓰레기줍다
이삭줍다
나뭇가지주워다가 모닥불피웠다.
작자는 지섭이 기왓장이나 주우러 나가지 않을까 싶어 새벽같이 집을 찾아왔다고 했지만….≪이청준, 춤추는 사제
2 남이 분실한 물건집어 가지다.

에서 줍다
지갑주워 경찰서맡겼다.
3 버려진 아이를 키우기 위하여 데려오다.

다리 에서 주워 온 아이.
4주로주워 다른 동사 쓰여이것저것 되는대로 취하거나 가져오다.

이것저것 주워 먹었더니 밥맛없다.
아이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주워 읽는다.
【↖줏다석보상절(1447)≫】

네이버 사전

줍다의 어간은 '줍'입니다. 이때 활용을 위해 어미 '어'가 붙으면 '줍+어'꼴이 되는데 연음되면서 ㅂ순경음이 됩니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날 것입니다. 비읍순경음은 'ㅜ'로 바뀌고 그래서 '주+우+어'가 돼서 '주워'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것.

문)모래가 모여 산을 이(1. 뤘 2. 렀)다.

답은 1번 뤘입니다. 이 경우에는 ㅂ순경음이 아니고 어간 자체가 '이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루+었'이 돼서 이뤘다가 되는 것입니다.

~~~에 도착했다는 뜻은 '이르렀다'가 되고 ~~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또는 ~~라고 말했다라고 할 때는 '일렀다'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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