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탑 개관

경북 남부지방 일대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 도중 가장 많이 본 것이 바로 탑입니다.

대학 다니던 시절 받았던 몇 안 되는 A+학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탑'에 대해 발표를 하고 받았던 것인 만큼 탑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탑을 보니 기억나는 것보다 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썼던 레포트를 찾아봤습니다. 거의 발굴에 가까운 정도의 수고수고를 통해 드디어 찾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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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탑(塔)


I. 머리말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전국적으로 석탑이 많다. 이렇듯 석탑은 한국미술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불교조형미술품 중에서도 그 주류인 탑파의 중심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품질이 우수한 화강암이 많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적인 유적 · 유물가운데 석조미술품이 다른 어느 것보다 그 수효가 단연 많다. 물론 석조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점판암이나 대리석 등으로 이루어진 석조미술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보다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훨씬 많으며 실제로 조사된 수에서도 화강암으로 된 것이 훨씬 많다.

이러한 현상은 화강암이 다른 암석보다 풍부하였고 특히 암질이 채석(採石)과 치석(治石)을 하기에 손쉬워 여러 가지 조각과 건조물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조나 지물(紙物), 토제(土製), 금속제(金屬製) 등의 여러 조형물이 재난을 당할 때마다 모두 불에 타버리고 파괴되어 때로는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와는 달리 석조물은 내구성이 있고 화재에도 잘 견디기 때문에 다른 어느 유물보다도 많은 수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많은 조형물이 석재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도 손쉽게 다량으로 채취되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불교가 들어온 이후부터는 불교미술품 전반에 걸쳐서 화강암이 그 조성재료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불교의 융성은 곧 장엄미(莊嚴美)를 갖춘 여러 가지 조형물의 조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때 다량으로 필요했던 화강암 등의 석재가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충당되었고, 이러한 연유로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탑이 건조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탑의 기원과 시대별로 탑의 특징과 대표적인 탑의 양식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II. 탑의 일반

가. 탑의 개념과 목적

탑이란 갖추어 말하면 탑파(塔婆), 즉 범어(梵語, Sanskrit)의 스투우파(Stūpa), 또는 팔리(Pli)어 투우파(thūpa)의 음사(音寫)에서 유래된 약칭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사리(舍利, Sarira)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이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불도들은 인도의 장례법에 따라 화장의 예를 갖춤으로써 그 유신(遺身)인 사리를 얻게 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구조물을 쌓은 것이 바로 탑파, 즉 불탑(佛塔)이 되었다. 그러므로 불탑은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탑의 어원에 대하여는 사리의 봉안유무에 따라 탑파, 또는 지제(支提, Chaitya)라고 하는 별개의 용어가 있다. 먼저 사리를 봉안한 탑을 ‘스투우파’라고 함에 비하여 사리가 없는 탑을 ‘차이티야’라고 구별하기도 하였다. 즉 앞의 것은 방분(方墳) · 원총(圓塚) 또는 고현처(高顯處) 등의 뜻이 있고, 뒤의 것은 영묘(靈廟) · 정처(淨處) · 복취(福聚) 등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스트우파’는 부처님의 신골을 봉안하는 묘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비하여 ‘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자는 순전히 불사리(佛舍利) 봉안처로서의 탑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석가와 관계되는 역사적 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석가의 사리는 양적으로 제한된 것이므로 차츰 사리신앙에도 변화가 있었다. 석가의 몸에서 출현한 진신사리(眞身舍利)뿐 아니라 불경(佛經)인 법신사리(法身舍利)를 봉안한 모든 탑이 있어서도 단순한 탑이란 용어로써 통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불사리를 봉안한 탑과 함께 불교의 모든 기념물적인 성격을 지닌 ‘차이티야’까지를 통틀어서 넓은 의미로서 탑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탑파 건립의 목적은 사리신앙에 있으므로 이는 불상과 함께 불교의 양대 예배대상으로서 널리 추앙되었다. 즉 불사리를 지닌 불탑과 부처님의 품격을 형상화한 불상이 가람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소위 당탑가람(堂塔伽藍)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불사리의 전래가 바로 탑파 건립의 직접적 동기가 되고 있으나 이들은 호국(護國) · 호법(護法) 또는 기복(祈福)과 같은 시대적 상황, 그리고 종교적 동기에 연관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이곳에 탑파 건립의 외형적 동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신라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도참사상과도 더욱 밀접한 연관을 지니면서 지세(地勢)나 형국(形局)에 따라 산천을 돕고 보호하려는 성격 아래 조성되었던 사례도 일단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한국적 특징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리라 본다.

나. 탑의 기원과 전개

한국의 탑은 어떠한 경로와 내용을 가지게 되는가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과 함께 현존하는 유적․유물에 대하여 짐작할 뿐 보다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와 함께 탑의 건립도 시작되었으며 양식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전수한 중층(重層)의 목탑형식이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구체적인 물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현존하는 유물․유적에 의하면 한국 탑의 기원은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삼국 말기의 시기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석탑을 가리켜 「始原石塔」이라 부르는데 백제(百濟)의 것은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五層石塔과 익산의 미륵사지(彌勒寺址) 多層石塔을 들 수 있으며 고신라(古新羅)에 있어서는 경주 분황사의 모전석탑(模塼石塔) 1기를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양국의 석탑은 그들이 석재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그들이 각기 지니고 있는 양식은 서로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백제의 石塔은 石塔발생 이전에 유행했던 목조탑을 모범으로 삼아 석재로서 번안함으로써 최초의 석탑을 건립하였고 이와는 달리 경주의 분황사탑은 전탑을 모범으로 삼아 안산암을 벽돌 크기로 작게 절단하여 쌓아 올린 점에서 그 양식의 특색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목탑이 지닌 내구성에 대한 취약점을 보완하는 한편 탑파가 지향하는 종교적 영원성을 석재로서 완성한 탑이다.

그후 삼국통일을 계기로 그 발생사유를 달리하는 목탑계와 전탑계의 석탑양식이 하나로 종합됨으로써 새로운 양식의 석탑을 낳았으니 오늘에 전래하는 신라통일 초기인 7세기 후반의 작품에서 그 事例를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신라의 석탑은 典型的인 양식에서 독특한 한국적인 양식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출발한 탑파형식은 그 전파국에 따라 각기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다. 그것은 불상과 같은 엄격한 규범 속에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건축기술이 적용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불교가 전파되는 각국의 건축기술에 의지하여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그대로 탑파건축에 적용하였다.

이로써 인도의 탑이 覆鉢形임에 비해 북방불교 계통에서는 한결같이 층수를 지닌 중층의 탑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결과 신라의 전형탑의 경우는 이중기단 위에 중층의 층탑으로 전개되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매우 독특한 건축양식과 조화미를 창안해 내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이것은 신라인의 예술적 천재성과 심미안의 접합에서 이룩된 일대 개가라 할 것이다. 이 조화미의 절정은 신라 8세기의 불국사 다보(多寶)․석가(釋迦) 양 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석가탑은 앞서 말한 전형 양식을 대표하는 석탑임에 비하여 다보탑은 소위 이형(異形)양식을 대변하는 절묘한 석탑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탑은 우리의 산하 도처에서 생산되는 화강석을 주재로하여 수많은 석탑을 만들기에 족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의 탑파미술은 10세기에 들어와서 태조 왕건의 불교진흥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불교사원의 건립과 함께 불사가 도모되었으나 그 조형미에 있어서 다시금 신라시대와 같은 불교예술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기단부에 비하여 더욱 둔중해진 탑신부는 상하에서 조화를 찾지 못하였고 예술적인 면에서 더욱 낙후되었다. 이는 신라말 9세기경에 일기 시작한 선종(禪宗)의 발달로 조사(祖師) 숭배의 풍조가 유행되자 그 문도들에 의해 건립되는 부도나 석비의 제작에 그 찬란했던 예술적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따라서 고려에 있어서는 석탑미술보다는 석조부도의 조성으로서 한국 석조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각부에 나타난 조각수법은 장식적 문양으로 더욱 화려해지고 복잡해지면서도 앞 시대와 같은 생명력 있는 예술적 기량은 영영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후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예술적 감각을 잃고 말았다. 이는 유교사회에 처한 불교예술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하겠지만 장인을 천시하던 조선시대의 사회풍조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석탑은 초기의 몇몇 석탑을 제외하고는 더욱 치졸한 느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조선의 국운과 함께 불교정책에 가해진 외적 요소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III. 한국의 탑의 형식



한국 석탑의 형식은 정방형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여 기단과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서 형성되나 기단은 이중 기단이 보편적이다. 이들 상하 기단과 탑신부에는 모두 목조탑의 결구 방식인 기둥을 모각(模刻)하였는데 이것이 각면의 모서리에 있다 하여 우주(隅柱)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단부에는 우주와 우주사이에 다시 수 개의 버팀기둥 즉 탱주(撐柱)를 모각하여 목조탑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대체로 탱주의 수는 시대가 내려오면서 줄어든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옥개석의 층급받침 역시 초기의 5단 받침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줄어든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옥개석 네 모서리[전각(轉角)]가 보다 경쾌하게 들려 반전(反轉)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초기의 경직되고 단조롭던 형식에 비추어 시대가 지나면서 더욱 반전이 심해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또 석탑 내부에는 사리를 봉안하게 되는데 그 소장처는 대체로 탑신 내부 사리공(舍利孔)이고 드물게는 기단 또는 지하에 봉안되는 수도 있다.

상륜부의 노반(露盤) 상부는 인도탑 형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즉 최상층 옥개 상부에는 인도탑의 기단 형식에 해당되는 노반을 설치하고 그 상부에 복발(覆鉢)을 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탑의 탑신 형식이다. 다시 그 상부에는 앙화(仰花)라든지 보륜(寶輪)과 같은 장엄구가 설치되지만 이들은 인도탑의 형식이 우리나라의 탑에 있어서는 그 상부 상륜부로서 대치되고 있다.

IV. 탑의 종류

가. 주재료별 구분

우리나라의 탑을 재료면에서 본다면 흙․나무․쇠․돌․벽돌의 다섯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반도 내에서 흑으로 만든 토탑이나 금속제의 소위 금탑이라 할만한 것은 주로 사리장엄을 위한 공예적인 소탑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국 탑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면 명실공히 한국의 탑은 목탑․석탑․벽돌탑 3종류에 국한시킬 수 있다.

목탑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 55호)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에 전해지자 가람을 장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새로운 건축이 가미되었다고 짐작되는 바 이것이 바로 탑전(塔殿)의 형식이다. 이는 중국 고유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서 사리신앙을 위한 불전이면서 동시에 높은 누각형식의 목조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짐작된다.

목탑의 형식은 전형적인 건축구조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단층기단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각 층의 옥개는 기와를 덮고 기둥사이에는 창방을 일종의 문호(門戶)로서 내어 내부에 출입을 가능케 함으로써 내부공간을 활용하는 건조물의 기능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상부에는 금속제의 상륜을 설치하여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냄으로써 석탑의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기단․탑신․상륜부를 형성하였다.

전탑은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탑의 건립에 앞서 벽돌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공정이 복잡하고 작업과정이 어려워 전국적으로 파급되지 못한 것 같다. 전탑의 형식은 목탑․석탑과 동일하지만 다만 옥개의 상하에 층급을 나타내고 있음이 일반 목탑이나 석탑의 형식과는 다른 점이다. 특이한 것은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 제56호), 안동신세동 7층전탑(국보 제16호), 안동조탑동 5층전탑(보물 제57호), 그리고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 제189) 등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다수의 전탑이 전해지고 있으며 기록상의 전탑까지 합하면 10여 개에 달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게다가 인접한 지역에서 모전석탑이 다수 건립되어 더욱 특이하다.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우리나라 탑의 전형이다. 현존하는 탑의 대부분이 석탑인데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활발한 건립이 있었으며 예술적으로도 가장 뛰어났다.

나. 지역별 구분

호 남 지 방

영 남 지 방

i) 백제탑의 영향으로 목조탑의 영향이 많다.

ii) 옥개석의 추녀마루[隅棟]는 기와를 얹은 것처럼 두툼하게 나타난다.

iii) 일반적으로 기단부의 최대폭에 비해 1층 옥개부의 폭이 더 넓다.

iv) 옥개받침의 수가 작고 옥개부가 전체적으로 아주 얇다.

i)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전탑이나 모전탑이 많다.

ii) 처마선은 거의 직선을 이루다가 추녀마루에 이르러 약간 반전한다.

iii)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단계적으로 감축하여 안정감을 준다.

iv) 일반적으로 옥개받침을 5단이고 옥개부가 전체적으로 두꺼운 편이다.

다. 시대별 구분

1. 삼국시대

◆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 石塔) :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탑이지만 근세에 이르러 그 상층이 붕괴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만 서탑의 6층까지의 동면(東面)만을 남기고 있어 그 모습을 추정할 뿐이다. 이 탑은 가장 충실하게 목탑을 모방하여 목재대신에 각 부재를 화강암 석재로서 사용하고 있다. 단층의 낮은 기단을 갖고 있으며 제1층은 3칸4면을 모하여 중앙 칸을 통하여 내부에서 十字로 교차되고 있다. 넓은 옥개와 그리고 그 밑에 층급형(層級形) 받침도 모두 목탑의 그것을 모방하였거나 변형하고 있다. 이 탑에서는 예술적인 창안이나 변형을 찾기보다는 목탑을 충실하게 돌로서 번안하려는 의사만이 일관하고 있다.

◆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夫餘 定林寺址 5層石塔) : 이 탑은 오늘날 그 상륜부(相輪部)를 잃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미륵사지탑과 같이 단층의 기단 위에 8매(枚) 구성인 제1탑신을 가지고 있으며, 넓고 얇은 옥개석과 그 밑의 2단(段) 받침으로서 구성되었는데 이는 모두 목탑양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지탑에 비교할 때 목탑의 충실한 번안이라기보다는 이 탑에는 예술적인 변형이 곳곳에 가해져서 작품 그 자체로서 가치를 한층 더하고 있다. 각 층의 감축비율이나 석재 짜임의 규칙성 등은 이 작품에서 지적할 수 있는 높은 예술성이라고 할 수 있다.

◆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 : 이 탑은 삼국사기에 분황사가 선덕여왕 3년(622)에 낙성기록에 따라 이 석탑의 연대를 추정할 수가 있다. 탑의 기단(基壇)은 잡석으로 쌓은 넓은 단층기단인데 탑신을 받기 위하여 1매(枚)의 화강암 부재를 그 중앙에 두었다. 감실(龕室)은 1층 4면에 마련되었으나 미륵사 석탑과는 달리 서로 교우(交又)되지 않았다. 현재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발굴된 석재로 미루어 5층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백제의 탑이 목조탑의 영향이 강한데 반하여 오히려 전탑의 영향이 강하여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것이다..

2. 통일신라시대

◆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感恩寺址 東西3層石塔) : 이 탑에서는 삼국의 시원석탑에서 볼 수 없었던 정비된 2층기단을 지니고 있다. 1탑신은 4우주(隅柱)와 4매의 벽판석으로 조립되었으며 그 옥개석은 8매의 낙수면 돌과 다시 4매의 받침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층의 받침은 모두 5단이다. 이 같은 탑신과 옥개의 석재조립은 상층도 같은데 기단의 광활함에 대하여 탑신 또한 거대하여서 그 탑신이 주체적인 비중을 지니고 있다.

이 감은사탑은 통일 직후에 조성됨으로써 통일의 기념탑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이에 따라 탑이 지니는 양식은 삼국에서 각기 시원된 석탑양식이 종합됨으로써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낳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불국사 석가탑(佛國寺 釋迦塔) : 석가탑은 신라 전형석탑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석탑이다. 이 탑의 형태는 2중 기단 위에 건립된 3층의 석탑이다. 상하, 좌우의 비례가 뛰어나서 다른 석탑의 모범이 되고 있으며 기단을 위시한 탑신, 옥개석 모두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듬직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각 부분에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탑 주변에는 장방석을 돌려서 탑구(塔區)를 형성하고 또 그 사이에 연꽃을 배치하였는데 그것을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고 한다.

석가탑은 1966년에 해체 수리 복원되었는데 2층 탑신의 상면 중앙부에 사방 50cm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동제사리외함(金銅製舍利外函)을 비롯하여 은제사리함(銀製舍利盒) 등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고 그리고 사리병에는 사리 1과(顆)가 있었고 또 곡옥(曲玉), 환옥(丸玉), 수정, 유리 등의 장엄을 위시하여 청동제 비천(靑銅製 飛天), 구리, 거울, 향목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유물 이외에 사리함 위에 얹혀 있던 두루마기 경전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장경으로 판명됨으로써, 세계 인쇄 기술사상 다시 한 번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 경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서 신라시대 조탑(造塔)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이 경전은 글자의 도법(刀法)으로 보아서 목판경전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 탑이 건립될 당시 신라에는 목조 인쇄술이 상당히 보급돼 있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인쇄술의 경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불국사 다보탑(佛國寺 多寶塔) : 이 탑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완전히 규범에서 벗어난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이루어졌다. 각부의 조각수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의 구조물을 보는 듯 아름다우며 복잡한 상하의 가구(架構)가 중심에 통일되어 하나도 산란함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인상적인 균정미(均整美)를 보이고 있다.

다보탑에서 볼 수 있는 특수 양식을 종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평면경영에서 전형양식의 기본인 방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바, 탑신부와 옥개석 등 각부를 8각 부재로 복잡하게 가구(架構)하였으나 상하부분이 서로 균형된 비율과 정형미를 보이고 있다.

둘째로 기단부 사방에 보계(寶階)를 가설하였다.

셋째로 상층 기단에 방주를 세우고 목조건축의 두공을 연상시키는 받침부를 시설하였다.

넷째로 갑석의 신부(身部)에 가구한 상하부의 난간과 죽절형(竹節形) 석주 및 앙련대석(仰蓮臺石) 등은 마치 목조 구조를 방불케 하고 있다.

다섯째로 전 부재의 치석과 결구수법의 문제인데, 화강암을 이렇게 목재 다루듯이 석재로서 수려하게 각 부재를 조성하여 촉감마저 온유한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

◆ 화엄사 4사자 3층석탑(華嚴寺 4獅子 3層石塔) : 이 석탑은 상층기단에 돌사자 4마리를 배치하였는데 신라시대의 사자탑으로는 유일하며 그 작품이 뛰어나서 다보탑과 함께 한국 이형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 석탑의 특수양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상층기단의 구조에 있어서 판석으로 이루어진 면석을 조립한 것과는 달리 4마리의 사자를 배치함으로써 각 면의 양 우주와 탱주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사자상을 일반형 석탑에 사용한 예는 이 석탑이 최초이며 이후 이러한 용례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여러 기가 있다.

사자는 특히 불교적인 조형미술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사자가 불교에서 연꽃과 함께 상징적인 존재로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관념에서 여래의 위치에 비유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하층 기단 면석의 각 면에 여러 종류의 천인상을 각양각태로 조각하고 초층 탑신에도 각 면에 문비를 모각한 좌우에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양각하여 장엄을 다하였다. 이러한 여러 조각은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정형에서는 볼 수 없는 이후 전형에서 장식적으로 변한 특수형 석탑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 실상사 동서 3층석탑(實相寺 東西3層石塔) : 기단 주위에는 넓게 장대석(長大石)을 둘러서 탑의 구획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불국사 석가탑에서의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와 같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 탑구 내부의 중앙에는 지대석을 마련하여 석탑의 하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하층기단은 하대석(下臺石)과 중대석을 붙여서 4매의 긴 돌로서 조성했다. 갑석은 상하 모두 경사가 급한 편이고 우주와 탱주 역시 우주 둘에 탱주 하나씩 상하 동일한 숫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다른 돌로 독립시켰고 옥개석의 받침은 4단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에 가까우나 낙수면의 전각(轉角)은 위로 솟아오르는 반전을 경쾌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의 석탑의 상륜부가 대부분 유실된 데 비해 이 탑은 거의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 방면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고려시대

◆ 월정사 8각9층석탑(月精寺 8角9層石塔) : 이 탑은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부를 건조한 형식으로 8각형의 평면을 이룬 점이 특이하게 보이는데 이 석탑의 특징을 부재별로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전체적으로 보아 서탑의 평면이 8각형을 이루고 있어서 선대의 方形平面에서 벗어나고 있다.

둘째로 층수(層數)가 많은 것도 주목된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정혜사지 13층석탑과 같이 다층탑이 적지는 않으나 이것은 방형탑인데 반해 8각형인 월정사지 탑은 다층에 다각인 것이 특이하다.

셋째로, 기단부에 있어서 하층기단에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연화대(蓮花臺)를 마련하여 장식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그리고 상층기단괴임대와 탑신괴임석이 끼워져 있는 것도 특이하다.

넷째로 각 층의 체감률이 적으나 기단부가 안정된 편이어서 오히려 경쾌한 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상륜부재의 장식은 석탑 전체를 장식적인 형태로 보이도록 하고 있다.

◆ 보현사 8각 13층석탑(普賢寺 8角 13層石塔) : 이 탑은 3단의 높직한 기대석을 중첩하고 그 위에 단층기단을 설치하여 13층의 탑신을 구성하였으며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석탑으로서는 가장 층수가 많으면서도 완형으로 보존되고 있는 석탑이다. 이 탑의 특징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기단부에 3단의 기대석 측면에 수미단(須彌壇)과 같은 문양을 조식(彫飾)하여 기저부터 장식적인 의장을 볼 수 있다. 기단은 역시 상하대에 앙복연(仰伏蓮)을 조각하여 마치 불상 좌대(座臺)와 같은 형식을 이루고 있다.

둘째로 탑신부에 있어서는 초층부터 身․蓋石의 체감이 아주 작은 편이어서 세장(細長)한 탑신을 이루고 있으나 개석이 광대하지 않으므로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전각(轉角)의 반전과 잘 조화되어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셋째로 정상(頂上)에는 청동제의 연화좌(蓮華坐)위에 상륜부를 올리고 있으니 이것도 이 석탑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 경천사지 10층석탑(敬天寺址 10層石塔) : 초층 탑신부에 새겨져 있는 ‘지정8년무자(至正8年戊子)’라는 명문(銘文)에 의하여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 즉 이 석탑은 당시의 추세로 말미암아 원나라의 라마교(喇嚰敎)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하겠으나 당시 고려의 불교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재료 및 건조양식과 각부의 기교에서 독창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이 석탑의 원위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경천사지였으나 일제 침략기에 일본인들이 자기네 나라로 불법반출했다가 그 후 한국으로 다시 반환되어 현재는 서울 경복궁 내에 세워져있는데 이로 인해 지대석은 결손 되고 없다.

이 탑의 구조는 기단부는 2층으로 이루어졌고 그 평면은 4면 두출성형(斗出星形)의 아자(亞子)형을 취하고 있다. 각 층의 면석에는 각기 불․보살, 인물, 초화(草花), 반룡(蟠龍) 등을 양각하였으며 각 모서리에는 절목원주형(節目圓柱形)을 모각하였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초층과 2,3층은 기단과 같이 4면 두출성형의 아자형 평면을 이루었고, 그 위의 4층부터는 방형이다.

각 층의 탑신 위에는 옥개석을 놓았는데 탑신석의 각 모서리에는 원주형을 모각하고 각 층, 각 면에는 십이회상(十二會相)을 조각하여 불·보상, 천부(天部), 기타 여러 가지 상을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단조로운 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원형의 평면으로 노반(露盤)과 연구문형(連球紋形)의 복발(覆鉢)과 앙련(仰蓮)으로 된 앙화(仰花)가 있고 그 위에 보탑형(寶塔形)과 보주가 있다. 그런데 이들 상륜의 각 부재는 우리 나의 탑의 상륜형식과는 달리 오히려 라마의 수법을 엿볼 수 있다.

이 석탑은 목조건축물의 각부를 모각하고 또 각부에 불·보살상을 빈틈없이 배치하여 그야말로 건축과 조각의 양면을 다 같이 구비하고 있는 특이한 석탑이라 하겠다.

V. 탑 속의 사리장치(舍利藏置)

탑파의 건립이 사리봉안에서 출발하였던 고로 眞身舍利이건 法身舍利이건 탑내에는 사리를 봉안함이 원칙이다. 인도의 카니시카왕(재위140-170)元年銘이 있는 사리기는 유명하거니와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탑파에서 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탑 속의 사리장치는 다른 불교국에 비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우수하다. 이를 시대별과 탑종별(塔種別)로 그 내용과 변천을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자.

가. 삼국시대

前秦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順道를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에 고구려로 보내어 불상고 불경을 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의 불교전래이다. 삼국중에서 지역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게 접하여 있던 고구려에는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탑은 없다. 다만 평양 청암리사지에서 8각목탑지가 추정될 뿐이다. 고구려의 탑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거의가 목조탑이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백제는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지 12년 뒤인 침류왕(재위 384-385)원년에 동진으로 부터 들어왔고, 성왕(재위 523-554) 30년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다.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궁궐을 짓는 등, 건축기술이 매우 발달하였던 백제는 7세기초에 불교전래 뒤 200년 동안 목탑 건립으로 익힌 기술과 경험을 살려 우리나라 최초의 돌[石]로써 탑을 세워 <한국석탑이 발생국>으로서의 榮譽를 지니게 되었다. 또 백제의 名工 아비지가 신라의 초청으로 왕도 경주에 가서 「皇龍寺木造9層塔」을 건립한 것은 ��三國遺事��에 보이는 사실이다.

이토록 불교문화가 찬란하였던 백제를 가리켜 중국으 기록에서 <寺塔甚多>의 나라라 하였다. 그러나 이렇던 백제도 오늘 지상에 남겨 놓은 탑은 오직 익산 「미륵자사지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5층석탑」등 2기뿐이고, 절터의 木塔址에 사리장치 상황을 짐작할 따름이다. 부여근처의 목탑지에서 심초석이 조사된 것은 군수리목탑지(軍守里木塔址)와 구아리목탑지(舊衙里木塔址)의 두군데이다. 심초석이란 중심기둥[察柱]을 받치는 초석이지만 구멍을 파고 사리를 장치해 두는 곳도 되는 것이다. 군수리목탑지에서는 일제 때 지하 약 1.6m에서 방형석이 발견되었으나 사리공은 마련되지 않고 석조여래좌상 1구, 금동미륵보살입상 1구, 金環 1, 玉類등이 발견되었다. 구아리 심초석은 2단으로 된 방공으로 한 변이 17.5cm, 깊이가 3cm와 한 변이 12cm, 깊이가 10cm의 구명인데 상단은 4각형 석개로 덮여 있었다. 사리공의 형도 방형과 원형의 두가지가 있는데, 오래된 탑에서는 각형이 더 많다. 백제의 방식은 신라와 일본에 전해져 일본 비조시대(飛鳥時代)의 목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근년의 일본 별륭사목탑의 사리공 조사에서는 이사실이 증명되었다.

이와 같이 목탑의 심초석에 사리를 장치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을 생각할 수 있겠다. 전북 지방에서도 최근의 조사 연구로 익산의 제석사지의 심초석(가로 25.5cm, 세로 61cm, 깊이 18cm)이 알려 졌다.

나. 신라시대

신라시대는 우리나라 탑 속의 사리장치에서 질적으로 으뜸이 되는 시대라 할 수 있겠다. 문헌에서 불사리(佛舍利) 전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찾는다면 삼국중 불교전래가 제일 늦은 신라에서 찾아 볼수 있다.

��三國史記�� 권4 「眞興王10年條」에는 중국 양나라에서 불사리를 전하니 진흥왕(재위 540-576)이 봉영(奉迎)하였다고 하는 짤막한 기록이 보인다

‘十年春梁遣使與入學僧覺德送佛舍利 王使百官奉迎興輪寺前路’

또 ��三國遺事�� 권3 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는 거의가 사리에 관한 기록인데 앞의 ��三國史記��에서 같이 진흥왕대에 양에서 사리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선덕여왕(재위 632-647) 12년(당 내종 정관17년)계묘년에 자앙법사가 佛頭骨 · 佛牙 · 佛舍利 100립과 불타가 입으셨던 <비라금점가사>한 벌을 가져왔고, 이때 가져온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목탑에, 하나는 태화사탑에, 나머지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긍강계단에 두었으며, 나머지 것들은 소재가 불명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문헌상 뚜렸하고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발견된 유물들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황룡사목탑이다. 진흥왕 14년(553) 계유년에 始建이 되어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16년에 몽고란에 불타 없어진 이탑은 신라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호국 · 호법에 큰 구실을 하였었다. 천 몇백년 동안 탑지에 묻혔던 舍利寶는 한때 무법자들에 의해 도굴되었었으나, 지금은 회수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때 발견된 「金銅塔誌」에는 900여 자의 쌍구체로 음각된 명문이 있어 경문왕(재위 861-875) 11년 重修때 사리장치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즉, 그내용을 모면 ��무구정광경��에 따라 소석탑 99기 각 기마다에 ��다라니4종경��을 넣어 철반(鐵盤 : 상륜부)위에 안치하고 다음해인 경문왕 12년에 공을 끝내었다. 주본사리는 심초석 가운데에 金銀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병이 안치도어 있었으나, 연월과 사유기는 없었다. 이 탑지의 판독으로 경문왕대의 사리장치 사정을 알 수 있을 뿐만아니라 사료로서도 매우 귀중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은 불국사 「석가탑」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문화사적 가치를 들어야 되겠다. 이탑은 1966년, 도굴배들에 의해 손상을 입어 해체 수리할 때 2층 방형 사리공안에서 ��무구정광경��이라는 다른 사리구와 함께 나왔다. 이 경속에는 당의 <則天武后字>가 4자나 있는데, <측천무후자>는 대체로 690년 - 704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석가탑」 건립 연대인 751년을 하한으로 한다면, 이 경이 이루어진 것은 그보다 앞서는 시기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인쇄된 경문으로서는 지금까지 最古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리니경��(770년)보다 20년이 앞서는 실로 세계 최고의 목판인경이라 하겠다. 「석가탑에서는 이 經 외에도 동경 2, 사리함, 유리제 사리병, 은제 사리외호와 내호, 목제 사리병, 은제 사리호, 목제소탑 13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중 유리제 사리병은 당의 양식을 따른 유일한 병이었는데 취급자의 부주의로 인해서 천년여 동안 보존되어 오다가 우리 세대에서 파손되었다.

♠ 신라시대에 ��무구정광경��에 의한 공양소탑(供養小塔)이 탑내에서 발견된 예

황복사 3층석탑(경주 구황리3층석탑. 성덕왕 5년. 706년)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경문왕대)

경주 창림사지석탑(문성왕 7년. 845년)

경주 황룡사목조9층탑(경문왕 11년. 871년)

합천 해인사일주문전길상탑(진성왕 9년. 895년)

♠ ��무구정광경��이 들어오기전과 그 뒤의 탑으로 이 경을 따랐다는 明記가 없고 사리장치가 발견된 탑들의 예

경주 분황사석탑(선덕여왕 3년. 634년)

월성 감은사지 서3층석탑

중원 탑평리 7층석탑

금릉 갈항사동서3층석탑(경덕왕 17년 758년)

傳 흥법사염거화상탑(문성왕 6년. 844년)

다. 고려시대

고려는 無血로 신라의 천년사직을 이어 받아 불교를 국교로 삼고 태조왕건의 <訓要十條> 발표등으로 각 지방마다 다트어 사원이 경영되어 탑파 · 불구 외에도 많은 불교미술품이 조성되었다. 건국초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였는데 새로운 활동무대에서 새로운 활력소를 얻어 신라말기 優美한 것에만 치우쳤던 기풍에서 벗어나 웅대한 기상으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13세기에 몽고의 침입으로 그들의 지배하에서 말기까지는 이질적인 그들 문화의 영향도 있어 高麗的인 미술활동은 침체될수 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의 사리장치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시대는 대체로 사리장치의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신라의 그것만 못하다. 그서은 施納이 국가적 차원서 이루어지느냐, 개인적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데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둘째, 탑내에서 供養小塔이, 비록 소수씩이지만 발견되는 일이 충남지역의 여러곳에서 이는 사실이고려시대의 사리장치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양소탑도 중부지역의 금강산을 한계선으로 하여 그 북부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셋째, 사리구를 탑내에 장치하는 곳도 신라대에서는 한 군데로, 그것도 대체로 제1탑신이 가장 많은데 고려시대에는 신라방식을 따르면서도 두군데, 심지어는 세군데에도 장치하는 예가 보인다. 넷째로 사리구에는 元의 영향을 받은 라마탑 형식의 사리기가 보이며 우리제 사리병도 거의 자취를 감추고 수정제 병등이 나타나는 점등을 들 수 있겠다.

라. 조선시대

신라 · 고려를 통하여 깊이 신봉되던 불교를 조선에 들어서는 배척하고 유교로서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으니 불교미술은 쇠퇴될 수 밖에 없었다. 건국초기에는 태조, 세조(재위 1455-1468)같은 불교를 아끼는 국왕이 있어 얼마간의 造塔事業이 있었으나, 후에는 사찰건물을 수리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함께 수리하게 도고 이러한 기회에 사리구가 追納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사리장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前述한바와 같이 탑을 수리할 때에 그사실을 기존의 탑지에 추가하여 기록하는 일이 있고, 둘째, 왕실과의 인연도 전연 끊긴 것이 아니었음과, 셋째, 궁녀들이 개인적인 축원문을 한글로 비단에 묵서하여 사리합 등을 몇 겹으로 싸서 納置하는 일들이 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VI. 맺음말

지금까지 탑에 대한 개념과 기원을 비롯하여 삼국,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는 탑의 양식을 살펴보았다. 한국의 석탑은 삼국 말기인 600년경에 백제와 신라에서 발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국 석탑의 전형양식을 얻게 되었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많은 우수한 석탑들이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전통은 고려에 계승되어 조선 왕조 초기까지 미쳤다. 한국의 석탑은 전형양식이라 일컫는 일반형과 특수양식이라 일컫는 이형양식을 들 수 있는데 각각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민족의 문화적 창의성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塔婆는 사리봉안을 근본 목적으로 하는 축조물이다. 탑 속에는 신앙의 소산인 舍利寶가 장치되는 것이므로 와관상의 미적인 삼상과 아울러 내적인 면도 고찰되어야 할것이다.

우리나라의 사리구는 형태구성에서 창의성이 발휘되고 높은 시술로 제작되어 일찍이 外來人들의 奪取의 좋은 대상이 되어 왔다. 일본인들은 무지몽해한 시골사람들을 사주하여 탑에 대한 불법행위를 저지르게 하고 배후에서 유물을 입수하는 등의 교묘한 수법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귀중한 사리보가 불법으로 처리되거나 해외로 유출되는 등의 역사적 비운을 겪게되었던 것이다.

과거의 사리장치 발견은 도굴범의 불법행위로 나온 것이 많기 때문에 학술연구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 온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의 사정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유품의 일부가 우리에게는 상당량 남아았음을 조금은 다행이라 할 수 있겠고 외국에 나가있는 우리 문화재의 반환이 빠른 시일내에 이루어 졌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

▶▶ 참고문헌

송석상, 이강승 1996 <<그림으로 배우는 우리의 문화유산>> 학연문화사

장충식 1987 <<新羅 石塔 硏究>> 일지사

1989 <<韓國의 塔>> 일지사

정영호 1989 <<빛깔있는 책들>>47 <석탑> 대원사

1992 <<韓國 佛塔 100選>> <韓國 中 · 近世 佛塔의 硏究> 韓國精神文化硏 究院

황수영 1992 <<韓國 佛塔 100選>> <韓國 古代 佛塔의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편집부 1996 <<추계 정기고적답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 학과


댓글 2개:

  1. 내 기억이 맞다면....이글은 분명히 "공동저자"가 있었을 텐데....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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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공동 저자가 두 명이나 더 있습니다. 다만 '온라인상에 이름을 밝히는 게 맞나?'하고 생각만 하다가 그냥 판단하지 않고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니 어떤 식으로든 먼저 밝혔어야 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굳이 이름을 밝히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위 글의 저자는 강봉훈, 김종욱, 송종우 이상 세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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