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역사 ] 1443년에 세종이 손수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정인지·박팽년·신숙주·성삼문·최항 등 집현전 학자 8명이 해설 붙이고 본보기 설명 조선 말기에 주시경이 한글 연구·교육 및 계몽활동 펼쳐… 1933년에 맞춤법 원리 확정돼 | |||
조 선의 넷째 임금 세종(世宗·1397 ~1450)은 많은 책을 읽고 공부하기를 즐기는 ‘학문의 사람’이었다. 왕실에서 나서 자랐어도 대궐 밖에 사는 백성의 어려움을 잘 알고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사람’이었으며, 음률에 민감해서 악기를 교정하고 새로운 악보를 창안할 만큼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재능의 사람’이었다. 특히 언어학 분야의 지식은 당대의 어느 사람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깊고 넓고 치밀했다. 그 모든 지식과 창의적인 재능과 겨레 사랑을 한데 쏟아부어 이룩한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라는 인류문화사의 꽃이다. 이 런 놀라운 글자를 어찌 한 사람, 그것도 나랏일에 분주한 임금이 만들 수 있었으랴 하는 의구심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집현전의 젊은 선비들과 더불어 만들었거나 아니면 신하들이 만든 것을 임금이 한 것처럼 꾸몄을 것이라 하기도 하나 ‘훈민정음(訓民正音)’이나 ‘세종실록’ 등에 “1443년 겨울에 세종이 손수 만들었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고 위대한 착상을 두 사람 이상의 집단이 해낸 사례가 거의 없는 점 등에 비추어 세종 한 사람의 발명임이 확실하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과정을 확실하게 밝힌 것은 1446년 가을에 펴낸 ‘훈민정음’밖에 없다. 이 책 앞머리에서 세종 자신이 훈민정음을 만들게 된 동기와 목적을 밝히는 머리말을 쓰고, 스물여덟 낱자와 여섯 겹자의 소릿값이며 받침 쓰는 법, 초·중·종성을 모아 적는 법, 소릿점 찍는 법 등 요긴한 내용만을 7쪽에 걸쳐 아주 간명하게 설명했다. 그 다음 58쪽에 걸쳐 정인지(鄭麟趾·1396~1478), 최항(崔恒·1409~1474), 박팽년(朴彭年·1417~1456), 신숙주(申叔舟·1417~1475), 성삼문(成三問·1418 ~1456), 강희안(姜希顔·1417~1456), 이개(李塏·1417~1475), 이현로(李賢老·? ~1453) 등 여덟 사람이 임금의 명령을 받아 공동으로 자세한 해설 곧 글자 만들기, 초성과 중성 및 종성의 풀이, 모아쓰기, 실제의 본보기를 설명하고 꼬리말을 붙였다. 이 밖에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무슨 책을 읽으며 연구나 조사를 했는지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신숙주와 성삼문이 중국의 요동으로 중국인 학자 황찬(黃瓚)을 몇 차례 찾아가 음운학을 배워 왔다는 사실은 1445년의 일인 만큼 1443년에 완성된 훈민정음 창제와는 무관하다. 당대의 한자음을 표준화하기 위해 1448년에 펴낸 ‘동국정운(東國正韻)’과 세종이 떠난 지 5년이 되는 1455년에 펴낸 ‘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을 짓는 데 필요한 전문지식을 얻으려고 찾아간 것이다. 세종은 아들 문종(文宗)도 거들게 했고 딸 정의(貞懿) 공주도 관여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한자나 중국어의 운학을 세종 스스로 깊이 연구한 것이 훈민정음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세종은 앞서 음률에 정통한 것처럼 한자 운학을 통해서 음운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당대 한국어의 음운체계를 연구할 수 있는 굉장한 언어학자가 되어 있었다. 세종이 새 글자를 반대하는 신하에게 “너희가 언어학을 얼마나 아느냐?”고 한 것은 결코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이들의 상소문 가운데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이 한자와 다른 글자를 쓴다는 언급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웃한 나라나 민족의 여러 언어와 문자에 대한 지식도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
▲ 훈민정음의 글자 뜻과 사용법을 풀이한 훈민정음 해례본. |
이 운모를 중성과 종성의 두 토막으로 다시 나눔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한자음이나 한국어의 소리마디(음절)를 세 토막으로 나눈 것이 세종의 독창적인 분석이었다. 아울러 초성과 종성이 음운적으로 같은 것임을 깨달은 것도 세종의 중요한 통찰이었다. 그래서 소리마디는 세 토막으로 나뉘지만 낱소리(음소)는 두 종류, 곧 초성이자 종성인 닿소리와 중성인 홀소리로 나뉘게 되어 글자를 두 종류만 만들면 되었다.
세종의 언어 분석이 여기에 이르지 못했다면 훈민정음의 낱자는 크게 불어났을 것이다. 초성과 종성을 동일시하지 않았다면 종성이 초성의 개수만큼 따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초성 낱자가 17개니까 종성 17개가 불어서 낱자만 모두 28개가 아니라 45(28+17)개가 되었을 것이다. 중성과 종성을 분리하지 못하는 이분법에 머물렀다면, 당대 한국어의 운모 곧 중성과 종성이 붙은 단위를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낱자를 만들었어야 할 것이다.
중성 낱자 11개와 종성 17개만 가지고 가정하면 적어도 187(11×17)개의 운모 글자가 필요하고, 여기에 초성 낱자 17개를 더하면 204개가 된다. 언어 분석의 깊이가 더할수록 필요한 글자의 수가 크게 줄어들고 간결해지고 이에 따라 언중(言衆)의 부담 또한 가벼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가나를 창안한 사람이 음운 분석을 한 단계만 더 진행했다면 현행의 히라가나 또는 가타카나 48 개는 훈민정음보다 적은 15개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훈민정음처럼 애초부터 언어 분석을 철저히 한 다음에 닿소리와 홀소리를 따로 만든 글자는 아마 없는 것 같다. 로마자의 홀소리 글자 5개(a i u e o)와 나머지 닿소리 글자(b c d f g h j k l m n p q r s t v w x y z) 사이에는 시각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 전혀 없다. 세종은 먼저 한자음을 비롯한 외국어 음운체계를 충분히 연구해서 일반 언어학의 기초를 다졌기 때문에 560년이나 지난 현대의 음성학이나 음운학과도 어긋남이 없는 성과를 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훈민정음은 당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대상 언어인 한국어의 특수성을 충실히 반영한 점으로 보아 과연 중국어와도 다르고 여느 외국어와도 다른 한국어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정확히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 훈민정음’의 글자 풀이 가운데 변두리나 시골 말과 어린아이 말의 특징까지 언급된 점으로 보아 예비 조사의 포괄성을 짐작할 수 있다. 훈민정음을 정작 만들어 가지기 전에 무슨 표기수단을 써서 음운 조사의 결과를 기록하며 분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짐작도 할 수 없다.
닿소리 글자를 만들기 위해서 닿소리를 만드는 음성기관 다섯 군데를 입술, 이, 혀, 어금니, 목구멍으로 구분한 것은 현대음성학과 완전히 일치한다. 글자의 모양을 얻기 위해서 음성기관 자체를, 입은 앞에서 보고 입 속은 옆에서 방사선으로 찍어 보듯 한 것은 어디서 누구로부터 배웠을까?
1867년에 영국의 음성생리학자인 알렉산더 멜빌 벨(Alexander Melville Bell)이 음성기관의 모양과 관련해 새로운 글자를 발명해 실험한 사실 말고는 유례가 없다. 이 사람은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라함 벨의 아버지다. 벨도 훈민정음을 본받아 한 것 같지는 않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는 속담은 이런 원리에 비추면 너무 거칠고 무지한 비유다. ㄱ을 발음하는 사람의 얼굴을 왼쪽 옆에서 투시하듯 보면 혀의 뒤가 굽어서 윗어금니께, 곧 여린입천장에 닿은 모습이 ‘ㄱ’처럼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나되 좀 더 세게 나는 소리를 적느라고 금을 더 그어 ‘ㅋ’을 만들거나 겹쳐서 ‘ㄲ’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세 글자에는 발음에 관련된 두 가지 정보, 곧 혀의 모양이 어떠하며 소리의 세기가 어느 정도인지 하는 소리바탕이 시각화되어 있다. ㄱ과 비슷하게 ㄴ 소리는 혀의 끝이 위로 뻗치고 혀의 바닥은 아래로 처진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이와 같은 혀의 모습으로 소리의 세기가 점점 세어지는 정도를 따라 금을 더하면서 ‘ㄷ’과‘ㅌ’을 만들고 겹쳐서 ‘ㄸ’도 만들었다. ‘ㄹ’도 ‘ㄴ’과 같은 혀의 모습으로 나기 때문에 ㄴ에 금을 많이 더하긴 했지만 소리의 세기와는 상관없이 만들었다.
▲ 한글날을 앞두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된 한글 조형물. |
ㅅ 은 혀 끝이 윗니나 윗잇몸에 닿아서 나는 소리이기 때문에 이 모양을 본뜬다 하면서 실제로는 한자의 치(齒)에 들어 있는 이 네 개 가운데 하나를 빼내듯이 만들고, 역시 세기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ㅆ, ㅈ, ㅉ, ㅊ을 만들었다. ㅿ은 소리가 ㅅ보다 여린데도 예외적으로 금을 더해서 만든 점이 ㄹ의 경우와 같다.
목구멍을 본뜬 ㅇ은 흔히 소릿값이 없는 글자라고 말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현대음성학을 개척한 이극로(李克魯·1897~1982) 선생이 이 글자의 소릿값을 정확히 판정했다. 그것은 목청 울림 자체이다. 목청 울림은 홀소리와 닿소리 일부에 수반되어 크게 잘 울리도록 하는 목청의 작용이다.
멀 리 들리지 않게 하려고 소곤거리는 말은 바로 이 목청 울림을 죽인 것이다. 목청 울림은 이처럼 말소리를 잘 울리게는 하나 독립적인 낱소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낱소리처럼 인식되지 못해서 흔히 무시당하고 마는 것이다. 낱소리는 되지 못하지만 소릿값이 없는 글자는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이 글자가 다른 닿소리 글자 ㅂㆍㅍㆍㄹ 등의 밑에 붙거나(ㅸ, ㆄ, ), ㄱㆍㄷㆍㅂ 등의 앞에 붙으면(ㅇㄱ, ㅇㄷ, ㅇㅂ) 목청 울림이 많아서 한결 부드럽고 가벼운 소리를 적는 데 쓰여 온 것이다. 이 글자보다 소리가 세어서 금을 얹은 것이 ㆆ(된이응)이고 더 세어서 또 금을 곧추세운 것이 ㅎ이다. ㆁ(옛이응)은 소리를 만드는 자리가 여린입천장이라 다르지만 가깝고 소릿값이 아주 비슷해서 혼동될 정도이기 때문에 ㅇ 위에 금을 곧추세워 만든 것이다.
홀소리는 만드는 자리가 닿소리처럼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음성학에서도 닿소리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구별하고 설명한다. 세종은 당대 한국어의 홀소리를 세 종류, 곧 밝은 홀소리, 어두운 홀소리, 중간 홀소리로 나누었다.
밝 은 홀소리 ㆍ , ㅏ, ㅗ 등은 ‘노랑’ ‘앙큼’ ‘얇아’ 등에서처럼 밝고 작고 얕은 느낌을 주는 낱말에 쓰인다. 어두운 홀소리 ㅡ, ㅓ, ㅜ 등은 ‘누렁’ ‘엉큼’ ‘엷어’ 등에서처럼 어둡고 크고 깊은 느낌을 주는 낱말에 쓰인다. 중간 홀소리 ㅣ는 중립적이라 어떤 홀소리와도 잘 어울린다.
밝은 홀소리는 하늘에 빗대고, 어두운 홀소리는 땅에 빗대고, 중간 홀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사람에 빗대어 하늘과 땅과 사람의 모습을 극한으로 수렴해서 점(ㆍ)과 수평선(ㅡ)과 수직선(ㅣ)으로 기본적인 세 글자를 삼았다. 이들을 일정한 원칙으로 조합해서 ㅗ, ㅏ, ㅜ, ㅓ를 만들고 ㅣ와의 겹소리를 적으려고 ㅛ, ㅑ, ㅠ, ㅕ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홀소리를 적는 모든 낱자나 겹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한국어에 특유한 홀소리 어울림현상을 반영한다. 이 현상은 20세기에 들어와 서양의 언어학자들을 통해 이른바 우랄알타이어족의 언어들이 공유한 것으로 추정되면서 비로소 우리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 국립극장 앞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행사에서 학생들이 훈미정음 탁본을 뜨고 있다. |
세종이 음성기관을 본떠 닿소리 글자를 만든 것만도 누구나 경탄할 수밖에 없는 착상이거니와 15세기 한국어에서 홀소리 어울림현상을 통찰하고 하늘, 땅, 사람에 빗대며 글자 맨드리에까지 빈 틈 없이 반영한 사실은 참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신비다.
훈민정음은 이처럼 인류 문자의 역사에 견줄 짝이 없을 만큼 위대한 발명품이다. 영국의 언어학자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가 밝혀 주었듯이 문자의 유형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른 ‘소리바탕글자’로서 유일하거니와 소리마디 단위로 모아쓰기를 한다는 점에서는 ‘소리마디글자’와도 같고, 주시경(周時經·1876~ 1914)의 연구와 교육 및 계몽 활동으로 말미암아 1933년 이래 확정된 형태주의 맞춤법의 원리에 따라 형태소나 낱말이 시각적으로 고정된다는 점에서는 ‘뜻글자’ 또는 ‘낱말글자’와도 같다.
결국 문자학적인 위상이 정점에 있으면서도 다른 문자 유형의 특색을 다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글자인 셈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영어 중독증이 심해지는 사회에서 그토록 위대한 임금 세종의 극진한 인간애마저 담긴 이 빛나는 문화재를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지켜 낼 수 있을지 근심스러울 따름이다.
김정수 한양대 국제문화대학 인문학부 교수·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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