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연_독하게 맘 먹고 독하게 실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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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금연 성공기

담배를 피우지 않은 지 어느새 7년 1개월이 지났다.
2001년. 전국적으로 금연 바람이 불었다. 개그맨 이주일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달리하던 해였다. 10여년을 피워온 담배를 끊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군대 병장때 한 3개월정도 끊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금연은 애당초 생각도 안했었다.

당시 정부차원에서도 각종 금연 정책이 쏟아졌다. 대형 빌딩 내에서 흡연을 금지하고 식당이나 당구장에서 담배를 팔지 못하게 했던 것도 그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평생에 한 번 금연을 성공한다면 지금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결혼 1년. 엄마 배속에는 애기가 자라고 있었다. 더욱 나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은 당시 사무실 분위기다. 사무실 선배들은 대부분 나보다 2~3년 앞서 금연을 시도했고 모두 다 성공했다. 다양한 금연 성공기도 들을 수 있었다. 적어도 금연 방해세력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 새해 1월 1일을 D-데이로 잡았다. 쉽게 먹은 마음이 쉽게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두 달 전인 10월부터 맘 먹기에 들어갔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1월 1일이면 금연을 할 것이라고 알리고 스스로도 거듭 다짐했다.

금연 1개월을 남겨두고는 그동안 안(못) 피던 다양한 담배에 도전했다. 비싼 담배, 외제 담배, 독특한 담배, 시가까지 골고루 피워댔다. 혹시 나중에라도 특이한 담배가 눈에 띤다고 요것 한번만 피워보자는 식의 '유혹거리'를 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흡연량도 조금씩 줄였다. 하루 한갑 넘게 피우던 것을 연말에 가까웠을 즈음에는 반갑 수준으로 줄였다.

흡연 마지막 날 저녁, 새 담배 한 갑을 샀다. 그리고 한 개피를 피우고 12시가 지나면서 금연을 선언했다. "이제 아쉬움도 없고 미련도 없고 경험도 할 만큼 했다.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

한 개피를 피고 남은 담배는 서랍장 구석에 뒀다. 라이타와 같이. 그것은 사무실이나 밖에서 혹시 흡연 욕구가 생기더라도 집에 가서 피우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첫날은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특별하게 어려움은 없었다. 그냥 습관처럼 생각이 나기는 했지만 그냥 참을 수 있었다. 둘째 날도 출근을 해서 일을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첫번째 고비는 세째 날이었다. 계속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조금 멍한 상태가 계속됐다. 사무실에서 거의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집에 두고 온 한 갑 생각이 계속 났다.

집에 가서 처에게 정중히 얘기했다. 한 개피는 피워야 될 것 같았다. 당시 집사람은 내 흡연에 대해 굉장히 무심했다. 거의 '피던지 말던지'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주 어렵고 정중하게 얘기했다. 아내는 물론 그러라 했고 마치 약을 먹는 기분으로 담배 한 개피를 피웠다. '이제 살겠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네째 날부터는 일부더 술과 당구를 칠 일을 찾았다. 애초부터 핑계가 없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술 먹을 때 피우고, 당구칠 때 피울 것이면 어차피 글러먹은 것이니까 그 고비를 넘겨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어려운 고비를 아직 정신력이 남아 있는 금연 초반에 잡았다. 당구를 칠 때는 담배 대신 계속 물을 마셨다.(그 때 이후로 지금도 당구를 치면 물을 아주 많이 마시는 편이다) 그리고 친구와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는 정신도 없이 잤다.

그후 일주일은 거의 정신줄을 놓은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됐다. 계속 졸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고 있기 일쑤였다. 금연 후 일주일즘 됐을 때 집에 있는 담배 한 개피를 더 피웠다. 정 어쩔 수 없이 피우게 될 때는 그냥 '피워버리자'는 생각으로 피우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절차를 만들고 마치 약을 먹듯이 해야 금연의 지속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후 그 담배는 적어도 1년 이상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계속 있었다.

10일 정도가 지나가자 일상적인 스트레스나 갈등은 없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불끈 솟아오르는 욕망은 여전히 계속됐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나서, 아내와 언성을 높이고 나서, 특히 게임에서 졌을 때 흡연 욕구가 굉장히 강해졌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특히 정말로 어려운 고비들은 초기에 다 경험해 버려서 점차 쉬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더불어 이미 고통의 50%는 견뎌냈는데 지금 실패하면 나중에는 병원에 누워서나 성공하겠다는 생각에 더욱 참을 수밖에 없었다.

흡연 욕구를 참는 데는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그냥 참았다. 사탕이나 과일 등을 권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의 경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만 물을 많이 마신 것은 조금 도움이 되는 기분이었다.

순간 순간 치밀어 오르는 강력한 욕구는 1년간 계속됐다. 한 달에도 몇번씩 담배를 피는 꿈을 꾼 것 같다. 어렸을 적 귀신 나오는 꿈, 군대 제대 후 군대 다시 가는 꿈 이후로 가장 공포스러운 꿈이 담배 다시 피는 꿈이었다. 1년 정도가 지난 후에는 일상적으로 담배에 대한 욕구는 거의 없어지는 듯 했다.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고 그 강도도 약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담배 연기가 좋았다. 그리고 심리적 공감대도 비흡연자보다는 흡연자들에게 형성됐다.

3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담배피는 사람들의 모습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길을 가다가 담배 불똥을 손가락으로 튀겨 끄는 사람을 보면 약간 짜증이 났다. 한 5년쯤 지나면서 가래침을 뱉거나 담배 꽁초를 아무데나 버리는 사람을 보면, 나도 저랬었는데 하고 이성적으로 이해는 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이제 완전히 끊었구나' 하는 자신감이 들었다.

나도 한 때 '흡연은 권리다'라고 생각했다. 남에게 조금, 아주 조금 피해를 주기도 하겠지만 다들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방에 앉아서 창문만 열고 담배를 피웠다. 남들처럼 베란다나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각종 금연 정책이 시행되면서 나에게 가해져 오는 제약들이 크게 싫었다. 그리고 실천을 위해 오래 생각하고, 오래 준비하고 독하게 실천했다.

금연을 하고 난 후,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아졌는지 스스로 확신할 만큼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기침이 조금 줄었다는 정도. 하지만 지금에 와서 흡연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저것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 억지로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내 눈에 보기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좋지 않은 것을 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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