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식 총리의 노인 지하철 무료 반대 그리고 보편적 복지


김황식 총리가 노인들의 지하철 무료 정책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말인 즉슨, 부자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들에게도 똑같이 무료혜택을 주는 것은 과잉 복지라는 것이다.

상당히 타당한 말로 들린다. 없는 사람만 도와줘도 부족한 판인데 늙었다고 부자들까지 도와주는 것은 혈세 낭비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복지에 관심이 많다는 사람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보편적 복지.....

지난 지방선거, 교육감 선거에서 이슈가 됐던 무상급식에 대한 논란에서도 이 말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부자들도 빈민층에 대한 복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바로 그것이다.

빈곤층이 많아지면 기존 질서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이 커지고 이는 곧 사회불안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부자들이 이미 더 잘 알고 있다. 고로 미리 십시일반 돈을 모아 빈곤층에게 베풀면 이들의 불만을 달랠 수 있다는 것을 구호처럼 만든 것이 바로 이 "노블레스 오블리제"다.

평생 부유한 삶을 살아온 김황식 총리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돈은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가난하지도 않은 게으른 사람들에게 줄 돈은 없다........."

우리의 옛날 이야기 속에서도 나오는 부자집 선행은 대부분 이런 행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돌아보자.

청동기라는 무기가 발명되기 이전. 한 사람이 부지런히 사냥을 해도 온가족이 넉넉히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에는 누구의 것을 빼앗을 것도 없고 빼앗길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자연히 이루어진 평등사회였다.

하지만 생산량이 늘면서 "잉여"라는 것이 생기고 힘 있는 사람은 이를 독차지하고 여기서부터 빈부의 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역사가 흐르고 생산량이 늘면서 이 빈부의 차는 끝 없이 커지고 빈곤층은 여전히 죽을동 살동인데 부유층은 배둘레에 두둑한 비계층을 형성했다.

그리고 수도 없는 빈곤층들의 반란... 그 과정에서 부자들도 자연스럽게 일정부분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는 방법으로 이들을 달래기도 했다.

그래도 욕심많은 부자들의 베풂은 언제나 부족했기에 "공산주의"라는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실험이 시도된 것이다. 극단적인 평등의 지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교훈이 았었다. 바로 보편적 복지가 그 교훈들 가운데 한가지다.

어차피 사회적으로 완전한 평등을 할 수는 없지만 빈곤층의 수준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 올려 사회적 안정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부자들이 마치 선심쓰듯이 자신의 재산의 일부를 내어놓는 형식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으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더 많이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현되는 것이 바로 누진세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월 100만원을 버는 사람은 세금이 없고 300만원을 버는 사람은 10만원, 500만원을 버는 사람은 50만원, 1000만원을 버는 사람은 200만원, 1억원을 버는 사람은 4000만원.

또 10평 집에 살면 세금이 없고 20평에 살면 10만원, 30평에 살면 30만원, 50평에 살면 100만원, 100평에 살면 2000만원.

이렇게 쌓인 돈으로 서민들의 보편적 복지를 실행하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라 함은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보펵적으로 필요한 분야에서 누구나 기본 수준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누구나 병원에 가면 일정 수준 이상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하고 누구나 학교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도 그렇고 노인들의 안정적인 생활 보장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기본적인 삶에 대한 보장이 충분히 이루어졌을 때 우리 사회는 복지가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의 서민들이 과감하게 경제적 투자를 할 수 없는 것도 실패했을 때 맞아야 하는 비참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성공했을 때 얻는 성취감을 짓누르고 남을 정도의 실패의 비참함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설령 도전에 실패했더라도 꽤 안정된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언제든지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재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젊은이들의 도전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우리 경제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경제력의 바탕에는 젊은이들의 피땀이 있었다. 결코 박정희 덕분도 정주영 덕분도 아니다.

지금까지 경제적 수준이 열악했을 때 젊은이들의 피땀이 필요했다면,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경제 발전을 이뤘다면 기꺼이 인정할만 하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경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의 수준을 올리는 것이 우리 사회의 소비를 진작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만이 3만~4만 달러 시대로 갈 수 있다. 이제는 부자들의 돈이 폭포처럼 아래로 흘러 내려올 것이라는 꿈은 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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