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시내-새만금-격포 채석강-곰소(숙)-고부관아터-전봉준장군 생가-조정래 문학관-김제시로 이어지는 1박2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997년 첫 방문 후 15년만에 찾은 고부 관아터(고부 초등학교)와 전봉준 생가는 그대로였습니다.
김제평야의 너른 들은 기분을 흐뭇하게 해주었습니다.
------------------------
군산....
일제시대의 쌀 공출 기지의 모습과 서해안 시대의 어마어마한 산업단지.... 익히 알고 있던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생각보다는 그 규모와 발전의 정도가 훨씬 컸습니다. 어디 특별히 들르지는 않고 시내를 한바퀴 돌고 산업단지 옆을 지나쳐 그대로 통과했습니다.
전에는 여행을 다니면서 산업단지 근처에는 부러 코스에서 빼곤 했는데... 이제는 찾아 가보곤 합니다. 그들은 어쨌든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주역들이며 삭막한 이 공간 또한 우리의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인지, 승헌이는 산업단지를 지나가는 동안 빨리 잔디밭으로 가자고 졸라댔습니다.
새만금.....
어쨌든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는 파괴의 현장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는 아픈 현실 정치의 현장이었습니다.
다음 정권은 또 현실 정치의 아픔을 안고 4대강을 안고 가게 되겠지요.
자욱하게 내려앉은 구름으로 경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격포 채석강.......
어쨌든 유명한 곳이래서 찾아갔는데.... 물은 깊게 들어와 있었고 낮게 드리운 구름으로 일몰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자연을 파괴하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저는 그것이 가슴아팠습니다.
경치가 좋은 곳이라고 하는데 좋은 경치보다는 대형 콘도만 눈에 띠었습니다.
곰소.
그냥 우연히 들른 모텔에 일찌감치 들었습니다. 바로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는데 우중충한 날씨로 물 가까이 가기도 싫었습니다.
방은 넓고 깨끗했습니다. 다만 바닥은 따뜻한데 비해 실내 공기가 차가워서 내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어야 했습니다.
밤참을 사기 위해 나간 읍내는 온통 깜깜했고 면사무소 옆 가게의 할아버지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암산이 척척이었습니다.
고부........
15년 전 답사때 가본 그대로였습니다.
마을 입구까지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서 찾지 못해 헤메지 않은까 걱정했는데 고부 관아터는 한 눈에 예전에 찾았던 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부 초등학교 운동장은 아직 얼어있었습니다.
승헌이는 요즘 부쩍 재미들린 농구를 하자고 했지만 낡은 골대와 울퉁불퉁한 운동장은 농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보니 체육관이 있었습니다. 아~ 시골이어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평 전봉준 단소와 생가
전봉준 단소에 먼저 들렀습니다. 15년 전에는 산소만 외로이 있었는데 그 새 단을 세우고 많은 비석을 세웠습니다.
산소 앞에는 종이 꽃을 담은 유리상자들이 많이 놓여 있었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들러 史實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직접 기려봄으로써 마음 속에 담는 의식이 같이 진행된 듯 합니다.
생가.
답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부엌과 뒤안 장독대가 그랬습니다. 어린시절 할머니 댁에서 보았던 모습이 그대로 떠올랐습니다.
흙을 다져 바닥을 삼은 부엌은 평평하지 못하고 마치 위 내벽을 내시경으로 보는 것처럼 울퉁불퉁했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간 모옥은 장정은 발을 뻗어 누울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좁았지만 무척 정겨웠습니다.
승헌이는 생가 방명록에, “전설이 느껴집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김제로 이어지는 내내 길은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고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내렸습니다.
다만 뿌연 날씨로 멀리 보이진 않았지만 마음은 더 없이 평안해졌습니다.
김제로 들어가는 길은............
자연 지형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만든 왕복 2차선 작은 도로였지만 수킬로에 걸쳐 직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길일 것 같습니다.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