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도처 유 상수

당구에는 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구에 처음 입문하면 30부터 시작해서 50, 80, 100, 120, 150, 200, 250, 300 순으로 올라갑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1000도 있고 2000도 있습니다. 1만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4구의 수지이고 3쿠션(대대)에서는 따로 수지를 책정합니다.

처음 당구에 입문하면 오른손 왼손 모두 흔들흔들 모든게 어색하고 안절부절하는 실력이 30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당구장에서 보내느냐, 당구장 사장하고 얼마나 친분을 쌓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 1년 당구에 빠져 살았다고 하면 150 정도가 됩니다.

이쯤 되면 당구를 쫌 안다고 하는 수준은 됩니다. 나름 자세도 안정되고 조절도 하게 되고 비로소 당구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수준입니다.

여기서 2~3년 바짝 당구에 관심을 가져야 300이 됩니다.

 300정도 되려면 당구장 사장과 쏘주 한 잔 하는 정도는 사귀어야 하며 당구장 내 여러 고수들과도 친분을 갖고 노하우를 전수받아야 비로소 오를 수 있는 경지입니다. 재수생이라면 학력고사 50점 정도는 까먹을 각오를 해야 하고 대학생이라면 두과목 정도는 F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당구를 10년 넘게 쳐도 300이 못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자친구의 유혹을 못 이기거나 취업의 압박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끔은 되지도 않을 고시 따위의 헛된 꿈으로 300으로 가는 길이 위협받기도 합니다. 이런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면 그냥 200이나 250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300정도에 이르면 흩어져 있는 공을 쉽게 모을 수 있고 한 번 모인 공은 쉽게 5~10점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상대에게는 겐세이로 공격을 방해합니다.

이런 정도의 고난을 극복하고 얻은 300이라는 명예는 대단합니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한 10년쯤 전만해도 대부분의 당구장 천장에는 ‘300 이하 맛세이 금지’라는 푯말이 대롱대롱 메달려 있었습니다.

드디어  사장님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맛세이를 구사할 자격이 부여되는 경지가 300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300이 되면 야스리(줄)를 찾습니다. 큐를 가져다가 야스리로 큐팁의 모양을 다듬고 탁탁탁 두드려서 자기 나름의 모양을 만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장님과 친분을 유지한다면 개인큐를 만들어서 당구장 한 구석에 따로 걸어놓고 전용으로 사용하는 특권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마추어들도  국제식 대대(프로 선수들이 국제 경기를 하는 정규 사이즈)에서  3쿠션을 즐깁니다.

나름 경지에 이른 당구 매니아라면 누구든지 도전하고 싶어집니다. 세계적 수준의 선수들의 경기 영상을 보면서 ‘나도 똑같은 조건에서 당구를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동호인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똑같은 조건에서 나는 어느정도 실력을 갖고 있는지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대대는 보통 처음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14점 정도의 수지를 부여합니다. 앞돌리기, 뒤돌리기, 옆돌리기, 빗겨치기 등 다양한 트랙을 구사하지만 아직 적절한 당점을 알지 못하고 스트로크도 불안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매니아들은 20~25점 정도의 수지를 갖습니다.

30점이면 아마추어 중에는 최고의 실력이라고 인정합니다. 이정도 실력이면 전국 규모의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도 입상할 수 있는 정도가 됩니다.

30점이 넘는다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프로에 입문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프로 선수들에게는 따로 수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붙여보자면 세계 랭킹 상위권에 입상하는 선수라면 아마 50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300들은 이 국제식 대대에서는 어느 정도 수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개인차가 매우 큽니다.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4구를 위주로 쳤고 3쿠션에 능통한 수준이 아니라면 18점 정도의 수지를 받습니다.

300 정도를 치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를 만나도 당구 좀 친다고 인정받습니다.  학창시절 당구에 돈 깨나 깨졌구나 합니다.

사회에서는 300정도 치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대를 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겨우 입문을 면한 수준입니다.

 그렇게 대대에서 20점 이상으로 올라갈려면 또 1~2년은 쳐야 합니다. 그것도 나름 고수에게 어느 정도 배움을 가져야 가능하지 혼자 책보고 연습해서는 올라가기 쉽지 않습니다. 파이브앤 하프시스템 아무리 달달 외워도 20점의 문턱은 높기만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25점 정도가 되면 아마추어로서는 할만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상 올라가기 위해서는 굉장히 특별한 정도의 자질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이상의 경지는 한 10년 당구를 쳤다해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지위가 아닙니다.

매일 일정시간 이상 꾸준히 연습을 하거나 프로 또는 그 이상의 선생님을 만나 꾸준한 배움을 갖거나 이마저 아니면 탁월한 눈썰미와 피지컬 능력을 보유하고 나아가 일반인과는 다른 멘탈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얻어지는 것이 30점이라는 경지입니다.

그런데도 대대가 있는 당구장을 다녀보면 30점 정도를 치는 고수는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당구 동호인의 수준입니다. 조금 규모 있는 당구장에는 이름 없는 프로 한 두 명은 있습니다.

인생 도처 유상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딜 가나 무림의 고수가 있기 때문에 항상 몸을 낮추고 조심해야 한다는 인생 격언입니다.

당구 조금 친다고 까불다간 큰코 다치기 십상입니다. 항상 배운다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또 겸손해도 어려운 게 세상입니다.

삼인행에 필유아사란 말도 있습니다. 3명만 모여도 그 중에는 내 선생님이 될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노력과 성취의 과정에서 얻어진 값진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몸에서 무수히 많은 사리가 쏟아진 것은 그 깨달음 알알이 몸에 하나씩 박히면서 쌓인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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