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뷰 타고 찾아가는 '나의 살던 고향은'

 

다음 로드뷰가 광역시를 비롯해 제주까지 서비스를 시작했네요.

어느덧 살다 보니 저도 많지 않은 나이지만 벌써 고향 떠나 올해로 20년째군요. 유행가 노래 가사에는 고향 떠나 10여년에 눈물만 흐른다고 했는데, 물론 저는 그동안 간간이 찾아가곤 했지만 그래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정말로 차곡차곡입니다.

지난번 스카이뷰가 나왔을 때만 해도 아버지 산소에 고향집 지붕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기만 했는데 로드뷰까지 서비스한다니 얼른 눈에 익은 곳들을 찾아봤습니다.

고향집

안타깝게도 고향집은 로드뷰가 바로 앞으로는 지나가지 않아 상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멀찍이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붉은 동그라미 안에 보이는 녹색 지붕이 바로 제가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 열 여섯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지금도 홀로된 어머니가 살고 계십니다.

판포오름

두 번째로 기억할 만한 곳은 바로 판포오름입니다.

판포오름은 해발 100m도 채 되지 않는 매우 야트막한 오름입니다. 제 고향집에서는 200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제 추억의 30%는 이곳에 있다고 할 정도로 우리들의 아름다운 놀이터이자 삶의 공간이었습니다.

겨울에는 눈썰매를 타고 불장난을 하기도 했으며 봄이 오면 고사리를 꺾으러 다니던 곳이고 여름에는 지네를 잡아서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겨우내 땔 땔감을 하러 가야 했던 곳입니다.

소를 키울 때는 소 꼴을 뜯기기 위해 오르락거려야 했고 겨울방학에는 극기훈련, 체력훈련을 한답시고 새벽에 일어나서 올라가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산 중턱에는 여기저기에 일제시대에 뚫어놓는 굴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소고릿디

초등학교 여름방학은 언제나 소고릿디에서 시작해 소고릿디에서 끝났습니다. 지금은 농업용수로 쓰면서 깊이 파버리고 앞쪽을 콘크리트로 보기 흉하게 바꾸어버렸지만 제 어린 시절에는 지금도 남아 있는 뒤쪽 벽처럼 앞부분도 돌담으로 쌓여 있어 훨씬 보기에도 좋았고 깊이도 그리 깊지 않아 더욱 좋았습니다. 다만 물은 그제나 지금이나 누런 흙탕물이었습니다. 제 헤엄의 기본도 다 거기서 익힌 것입니다. 오전 열시가 넘어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면 거리에서 놀던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루루 달려 소고릿디로 향하는데 20m 전부터 입고 있던 몇 장 되지 않은 옷들을 홀딱 벗어 던지고 허연 엉덩이를 드러내고 자멱질을 하곤 했습니다.

바닷가

나중에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소고릿디보다는 물도 맑고 이것 저것 잡아 먹을 수도 있는 앞바다에서 놀았습니다.

멀리 비양도가 보이는 판포 앞바다는 가끔 텔레비 광고 배경으로도 쓰일 정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하얀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얼마 전 사진 중앙을 가로지르는 방파제가 생긴 후로는 모래사장이 모두 물 속으로 잠겨버렸습니다.

이곳에서는 수영도 하고 낚시를 하기도 하고 소라, 전복, 성게와 같은 각종 어패류를 잡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특히 어쩌다 문어를 한 마리 잡는 날이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바닷가2

그런 의미에서 바다 사진 한 장 더 넣었습니다.

저희 마을 옛이름이 널개인데 아마도 해안선이 길어서 너른 개라는 뜻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널판(板) 개포(浦)로 된 것입니다. 그것도 아마 일제시대에 모든 지명을 한자화하면서 저질러놓은 잘못인 것 같습니다.

판포초등학교 입구

누구에게나 모교는 추억의 장소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등학교는 왠지 애틋함을 주는 곳입니다. 하지만 제가 졸업한 그 국민학교는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던 바로 그 해에 마지막 졸업생을 보내고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그 땅을 싹둑 잘라 주택 단지로 새로 조성하고 남은 공간에는 마을 젊은이들이 잔디를 심어 마을 운동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디나 시골마을이 다 비슷하겠지만 저희 고향마을은 새마을운동을 할 때부터 변모를 시작해 지금은 옛 모습은 거의 찾을 길이 없습니다. 구슬치기하던 곳, 숨바꼭질하던 곳, 어르신들 장기를 두던 곳, 모두 찾을 수는 없지만 어는 곳 하나 그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옛신창중학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면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소나무밭은 한 달에 한 번 민방위훈련을 할 때면 모두들 모여서 고개를 처박고 킥킥대던 곳입니다. 지금 다시 보니 '내가 저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공부를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지금은 중학교도 초등학교가 폐교되던 해에 같이 통합돼 더 이상 쓰이지 않고 그래도 이름은 유지해서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와 같은 마당을 쓰고 있습니다. 분명히 세상은 점차 좋아지고 있지만 시골 아이들은 인원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자기 아버지 세대보다 못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도 질리지 않는 곳, 보고 또 봐도 또 보고 싶은 곳, 머리에 떠 올리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드는 곳이 바로 고향입니다. 여러분들도 혹 그리운 고향이 있으시면 이 따뜻한 봄에 꽃구경을 겸해 한 번 다녀오세요. 아니면 지금도 고향 떠난 자식을 마냥 그리워할 부모님께 안부전화라도 한 통 꼭 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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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1. 고향이 있고, 좋은 추억이 있어서 부럽습니다.
    지방에서 결혼하시고 서울로 올라오신 부모님이 저를 서대문에 낳았다고 해서, 가끔 누가 고향을 물으면 서대문산(?)이라고 합니다. ㅡ.ㅡa;;;

    분명 좋아진다고 하는데, 개발이란 말로 훼손되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예전 것을 보전하고 개발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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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추억은 많은 경우 제게 힘을 줍니다. 하지만 때문에 남들이 가지고 있는 인연, 학연, 지연 하나도 없는 것이 가끔은 속상하기도 합니다.

    제 아들도 벌써 서울 산입니다. 야구도 LG와 두산을 좋아합니다. 농구도 삼성을 좋아하더군요.

    개발···
    고향 떠난 사람 입장에선 늘 과거가 그립지만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은 또 살아야 하니까 아쉬움은 늘 저 혼자만의 것입니다.

    하지만 또 대책 없는 개발이 너무도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제주 강정이라는 곳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답니다. 지역 주민들은 죽어라고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밀어붙이는 분위기입니다.

    강정 앞바다는 바다 속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혹 바다 속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시는 분은 다 아는, 제주 바다 가운데에서도 제일 유명한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차라리 저희 고향 마을에 해군 기지가 들어왔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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